2024/12/29

제가 일본에서 해낸 프로젝트들

 여기서는 제가 일본에서 수행한 여러 프로젝트들중에서, 제 나름의 지혜과 방법으로 성공시킨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서 독자분들의 직장에서의 프로젝트 수행에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통신/IT 분야의 PM/TPM/엔지니어 분들께는 좋은 참고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목차

1) 광장비를 이탈리아 공장에서 기간내에 못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제가 이탈리아에 가서 성공시킨 이야기
   이야기 (1)
   이야기 (2)
   이야기 (3)
2) 프리세일즈가 못하겠다고 한 프로젝트를 제가 상하이에 가서 도움을 받아내 성공시킨 이야기
   이야기 (1)
   이야기 (2)
3) 저희 회사 서포트 (유지보수)팀의 서포트에 실망했다면서 다음 한 해 연간 유지보수 계약(약 10억원)을 하지 않겠다는 고객 WILLCOM 의 과장님 와타나베상을 설득해서 연간 계약을 하게 한 이야기
   이야기 (1)
   이야기 (2)
4)신-오사카 신간센 역안에서 휴대폰 2대로 5시간동안 원격으로 시스템의 문제 대응한 이야기

5) 회사에서 일 잘하는 비결
  팀장으로서 (1)
  팀원으로서 (2)

구체적인 내용

1) 광장비를 이탈리아 공장에서 기간내에 못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제가 이탈리아에 가서 성공시킨 이야기

이야기 (1)

우리가 인터넷을 사용할 때, 속도가 10G (기가비트)인지 100G (기가비트) 인지는, 예를들어, 서울에서 부산간에 광케이블이 깔려있기 때문이고, 또, 한국과 일본, 한국과 미국등 국가간의 인터넷은 바다밑에 해저 광케이블이 깔려있기 때문이죠. 이런 분야의 제품 (광케이블/광신호 증폭기등)를 보통 '광장비'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통신사업자들 (Docomo, KDDI (aU), Softbank)등이 전통적으로 품질이 좋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서 품질이 증명된 NEC 나 Fujitsu 제품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당시 외국 업체가 이런 광장비를 일본의 통신사업자에게 판매하기는 아주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Softbank 가 당시 저희 광장비를 처음으로 도입하겠다는 결정을 했고, 저희 회사는 일본에서의 첫 판매 성공사례로 이 프로젝트를 꼭 성공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죠. 당시 저희 회사내 이 광장비 생산은 이탈이라 밀라노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해서 전세계에 보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희 일본의 영업과 PM (Project Management)팀이 이탈리아의 이 생산공장 기획부 부장 Mario 와의 전화회의에서 이 프로젝트의 개요과 규모, 스케줄등을 설명하면서 생산을 부탁했죠. 그런데, Mario 가 이렇게 갑자기 부탁을 해서는, 원하는 기간내에 생산을 해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최소한 6개월전에는 미리 연락을 해 줘야 필요한 부품들을 전세계 vendor (부품 생산업자)들로부터 구입해서, 공장의 생산/시험 라인을 만들고, 필요한 인력을 투입해서 조립생산 및 기능시험등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3개월만에 만들어 달라고 해서는 해 줄 수 없다고 답을 합니다. 일본팀은 고객과의 협상과정에서 시간이 걸렸고, 미리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지만, 어떻게 재발 부탁한다는 회의를 거의 3주이상 매주 월요일에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Mario 는 "I told you already" (이미 안된다고 말했잖아)를 반복하면서 화를 낼 뿐이었습니다. Softbank 와 약속한 프로젝트 스케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일본팀은 아주 곤란한 입장이었고,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게 되었고, 여러 고민끝에 누군가를 이탈리아 기획부/공장에 보내자는 결론에 이르렀고, 당시 6,7명의 베테랑 일본인 PM들이 있었지만, 나름 'communication' 능력이 탁월하다고 소문이 나 있던 저를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Mario 에게 Johnny Five (저)를 그곳에 보내겠다고 하자, Mario는, "J5가 와도 바뀔 것은 없어, 소용없어, 올 필요없어"라고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일본팀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저를 보내기로 했고, 저는 담담하게 "알겠습니다. 제가 이탈리아 현지에 가서 어떻게 든 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3일후에 비행기/호텔등의 예약이 된 상태에서 저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나리타공항에서부터 이 임무를 해내기 위한 저만의 전략으로 시작했습니다.
먼저, 거기 기획팀 약 19명의 직원들에게 줄 선물을 사고, 부장급 3명에게 줄 선물은 좀 더 좋은 걸로 샀고, 그리고, 이탈리아어 회화책을 한권 샀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옆자리에는 젊은 연인이 탔는데, 남자는 이탈리아사람, 여자분은 프랑스사람이었고, 둘은 건축일을 하는데, 일본의 건축물들에 대해서 알아보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이탈리아에 처음이고, 비즈니스 관계로 간다면서, 이탈리아사람들과 어떻게 일하면 좋은지 어드바이스 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러자, 이 이탈리아인 젊은 남자가, 이탈리아 축구를 예로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를들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축구는 아주 조직적이고 정교하지만, 이탈리아 축구는 그리 조직적이지 않고 조금은 허술한 듯 보이지만, 골하나 넣어서 이기는 식이라면서, 비즈니스에서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하는게 아니라, 커피마시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에, 뭔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부탁하고 들어주는 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어드바이스를 듣고, 제가 거기가서 첫날 기획부 사무실의 사람들과의 첫 대면때,  커피를 마시면서, 그리고 제가 산 선물을 주면서, 저의 간단한 자기소개를 이탈리아어로 하면, 일단 처음부터 웃음으로 시작할 수 있겠구나 생각해서, 저의 간단한 자기소개를 영어로 써서 옆의 이 이탈리아 남자에게 부탁해서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받았고, 비행기안에서 반복해서 외웠습니다. 호텔에 체크인 후, 다음날 아침 그 기획부사무실에 가서 직원들과의 첫 대면장면은 역시, 사무실 건물내의 커피 자판기앞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한사람 한사람에게 제가 사 간 선물을 주면서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했고, 다들 웃으면서 반겨줬습니다. 그 무서운 Mario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기획부 사무실에서의 인사를 마치고, 같은 건물내에 있는 다른 부서들도 돌아다니면서 제 소개를 하면서 인사를 했는데, 그 중에 한 부서는, 여기 밀라노의 기획부에서 기차로 약 5시간 떨어져 있는, 광장비 생산공장에서 생산한 제품들을 밤새 트럭이 이곳으로 실고 오면, 이곳에서 포장해서 전 세계 목적지로 보내는 shipping 부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 부서의 팀장인 Debora에게 매일 아침 혹시 일본으로 보낼 제품이 있으면 몇개 어떤 것이 있는지, 나한테 엑셀로 뽑아달라고 했고, Debora는 Babara 라고 하는 여직원에게 내일 아침부터 J5가 필요한 자료를 뽑아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날 아침부터 그 기획부로 가는게 아니라, 이 shipping 부서로 가서 Baraba로부터 자료를 받아서, 일본의 프로젝트팀에 보내게 됩니다. 일본팀에서는 J5가 이탈리아에 가자마자 바로 이런 자료가 오게 되었다고 많이 놀라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shipping 부서로부터 이런 자료를 매일 아침 받는다는 것은 Mario나 그 기획부의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었죠. 그런 다음 저의 작전은, 3주동안 여기 있을 거고, 3주는 비교적 긴 시간이니까, 처음부터 일 예기는 하지 말고 일단은 여기 기획부사람들과 친해지자, 친해지고나서 뭔가를 부탁하면 잘 들어주겠지라고 생각해서, 친해지는 방법으로 매일 아침 호텔에서 그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탈리아어 회화 책을 보면서 2,3 회화표현을 외워가서. 사무실의 사람들에게 아침 첫인사를 외워간 이탈리아어로 하면 다들 재미있어라 했고, 이어서 영어의 이 표현은 이탈리아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물어보았고, 그러면 서로 저에게 알려주면서, 어느새 사무실 분위기는 재미있어졌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때는 다 같이 건물내 회사 카페(식당)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오후에는, 제가 기획부의 한 쪽 자리에서 제 일을 하면서, 일에 대해서는 (일부러)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서 Marilsa 라는 여직원이 와서, "J5, 너는 왜, 일본 프로젝트에 관련해서 아무 부탁도 하지 않니?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오면 이것저것 부탁하면서 귀찮게 하는데, 너는 왜 아무 부탁도 하지 않니?" 라고 말하길래, 제가 "사실 부탁하고 싶은 건 많은데, 너가 많이 바쁜 것 같아서 안하고 있는 거지, 내 부탁 좀 들어줄래?" 그러자, Marilisa "그래, 부탁해 들어줄 께" 라고 했고, 저는 "그럼, 매일 오후 4시부터 1시간 나와의 미팅에서 매일 매일 공장에서의 생산현황을 공유하고 그 중에서 일본 프로젝트와 관련한 생산현황도 공유해 줘" 라고 했고, 흔쾌히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해서, 저는 이제 기획부의 담당자로부터 매일의 공장의 생산 현황을 파악해서 일본 프로젝트팀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매일매일의 생산 현황 자료가 있어야 일본에서도 프로젝트 진행 계획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으로 기차로 5시간 떨어져 있는 공장에 전화해서 제가 금요일에 이동해서 토요일 오전에 공장을 방문하겠다고 하고, 금요일에 기차로 이동해서 토요일에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러자, 그곳 공장장이 저에게 공장을 안내하면서, "사실은, Mario 기획부장의 지시로 공장내의 여유 부품들을 총 동원해서 일본 프로젝트을 위한 시스템을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을 해도, 제품 외관의 미세한 기스나 제품 이름등의 라벨의 위치가 좀 삐뚤어져 있다는 식의 외관상의 것들이 일본 프로젝트에서 요구한 품질규격에 미달해서 못 보내고 있다면서, 공장내 한 모퉁이에 수북히 쌓여있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이들 제품의 동작시험은 모두 문제없이 통과한 것들로 단지 외관상의 문제들이라는 것이었고, 이런 외관상의 문제들은 전 세계의 제품 생산회사들로부터 구매할 때부터의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 공장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저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이유로 일본으로 못 보내고 쌓여있는 제품들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찍어서 회사내 네트워크에 올리고, 바로 토요일 오전에 일본 프로젝트팀과의 화상회의에서 이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제품 동작기능시험은 다 통과해서 기능상 전혀 문제가 없는데, 단지 외관상의 문제이고, 이건 이 공장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일본에서 고객 Softbank 에도 설명해서 이해를 받는 걸로 하고, 이걸 다 일본으로 보내기로 하자, 라고 일본팀을 설득했고, 일본팀도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공장에 쌓여있던 제품을 모두 다 일본으로 보내게 되어 일본에서도 이제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곳 공장장은 저에게 한 없이 고마워했습니다. 제가 밀라노 기획부로 돌아와서 월요일 출근하자 그동안 저에게 한마디도 안 하던 Mario가 커피 같이 하자면서 제가 공장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줘서 고맙다면서, 제가 있는동안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이 일본팀에 전해지자, 일본 프로젝트팀은 "아니, 그렇게 무서운 Mario가 드디어 J5하고 커피를 마셨데" 라면서, "와, J5 가 현지에 가니까, 문제들이 하나하나 다 풀리네, 역시 J5 대단해" 라고 들 했죠.
그러자, 저희 PM팀의 팀장 니시카와상이 저한테 전화해서, '뭐, 호텔 생활상의 불편함은 없는지, 뭐 먹고 싶은 건 없는지등을 물어보았고, 니시카와상은 제가 먹고 싶다고 한 일본의 여러가지를 한 박스 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일본에서는, 이탈리아에서 보내온 장비를 일본내 렙 (lab)에서 다시 동작확인 시험을 해서 고객에게 시험결과를 보고하고나서, 설치작업을 하는 식으로 진행을 했는데, 그 동작시험에서 때로 문제가 발견되면,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문제인지, 원인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등에 대해서 매일 매일의 고객과의 미팅에서 보고하게 되고 그 문제에 대한 자세한 원인/해결책등에 관한 고객의 질문등을 Mario에게 이메일로 보내서 자세한 대답을 듣고, 그걸 다음날 고객에게 업데이트하는 식이 었는데, Mario가 좀 처럼 시원한 답을 제때에 해 주지 않아서, 일본의 프로젝트팀이 프로젝트 진행상에서 곤란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PM팀의 부장 George 가 저에게 연락이 와서, Mario가 일본팀으로부터의 이메일 질문에 좀처럼 자세히 대답을 안 해 주니, 저보고 Mario로부터 대답을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하고, 또 저만의 방법으로 Mario 에게 메일을 썼습니다. 그건, Mario가 일본팀과의 여러번 전화회의에서 매번 "I told you already (이미 말했잖아)" 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Mario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제 나름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Mario에게 이메일을 쓰기 전에, 지금까지 일본팀과 Mario간에 주고 받았던 메일 내용을 다 보고, 어떤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는지 파악한 다음에, 제가 Mario에게 쓰는 이메일에서는, 먼저, 그때까지의 Mario가 한 대답을 다 정리해서, 여기까지는 알았고, 이해했는데, 추가로 고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을 부탁한다는 식으로 썼습니다. 즉, 이미 한 질문과 대답을 다시 하는 것이 안임을 확실히 해서 메일을 보내는 식으로 했죠. 그러면 Mario는 제 메일을 받으면, 바로 저에게 전화해서 언제까지 답이 필요하냐고 확인했고, 저는 일본시간으로 다음날 오후 3시에 고객과의 daily meeting이 있으니 1시까지 답해달라고 했고, Mario는 매번 자세히 바로바로 이메일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이로인해, 일본팀은 또 한번 저의 일처리 능력에 놀라워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사이에 2주가 지났고, 그 다음주 목요일이 출장 마지막날이었습니다. 저는, 많이 도와준 여기 사람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야 겠다고 마음먹고, 일요일에 제가 영어로 쓴 긴 감사의 편지를 호텔 직원에게 부탁해서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두었습니다. 드디어 목요일 마지막날 다 같이 점심을 먹고 오후에 이메일로 저의 감사편지를 보내고,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면, 다들 "이 편지 니가 쓴 거야?" 라고 놀라워하면서 물어봤고, 저는 반 농담으로 "그래, 내가 쓴 거니까, 답장을 이탈리아어로 해 줘, 그래야, 내가 이탈리아어를 더 공부하지" 라고 하면서, 재미있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이탈리아팀에게 쓴 이 (영어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감사편지가 일본팀에도 공유되었고, 일본팀은 다시 한번 저의 행동에 감탄했고, 부장 George 는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You did great job" 이라며 극찬을 해 주었습니다.

이로서, 저는 3주간의 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고, 저희 Softbank 광장비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도쿄 - 나고야간 광케이블 설치 및 시험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본에 돌아오자, 제가 이탈리아에서 한 성공스토리가 일본 회사내에 퍼졌고, 혹시, '이탈리아팀과의 프로젝트에서 곤란한 문제가 있으면 J5에게 부탁하면 된다'라는 소문이 퍼졌고, 실제 다른 팀의 프로젝트에서 이 소문을 듣고 와, 저에게 부탁을 해서, 제가 지금까지 전혀 관여하고 있지 않던 다른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탈리아에 2주 출장가서 해결해 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프로젝트의 수행에서 필요한 것은 관련 프로젝트에 관련된 기술정보를 많이 파악하고 알고 있는 것 외에도, 이런 식의 communication 스킬과 더불어 문제 해결의 접근 방식도 아주 중요한 것이죠.

PS: 저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오기 전에 저를 특히 많이 도와준 기획부의 Marilisa 가 결혼해서 아직 아이가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같은 부서 동료들에게 Marilisa 가 아이를 낳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달라고 했고, 약 1년후에 아이를 낳았다는 연락이 와서, 제가 바로 신주쿠시내의 큰 백화점에 가서, 신생아옷등을 한 박스 사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꾸준히 이탈리아 기획부팀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프로젝트가 끝난후에도, 일본팀에서 뭔가 이탈리아팀에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저를 통해서 연락하는 역할을 당분간 맡아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2)

3주동안의 이탈리아 출장중에 주말에는 전철로 밀라노 시내에 가곤 했는데, 저는 전철안에서 사람들과 쉽게 대화를 했습니다. 그 방법은, 전철에 앉아서 이동중에 이탈리아 회화책을 펴고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좌우 옆에 앉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책의 표현을 보여주면서,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이 표현이 영어로는 이런 뜻인지등을 물어보면,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 나라말을 공부하는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게 되고,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제가 밀라노에 처음인데, 어디 구경할 곳 없나요?" 라든지, "어디 맛있는 피자집 아세요?" 의 대화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밀라노 시내를 구경하고 숙소 호텔로 돌아오는 전철안에서 저는 또, 앉아서 이탈리아어 회화책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옆에 젊은 아가씨가 앉아서, 제가 회화 표현을 물어보는 것으로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 아가씨는 루마니아에서 온 아가씨로, 대화중에 저보고 혹시 루마니아에 올 일이 있으면 자기네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가려면 전철역에서 내려서 택시를 불러 타고 가야 하는데, 제가 택시회사 전화번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여서 이 아가씨한테 사정을 말했더니, 이 아가씨가 제가 내래는 전철역에서 같이 내려서 택시를 불러 저를 태워주고 돌아가기까지도 했습니다.
이렇게 전철안에서 낮선 사람과 쉽게 대화를 하는 것은 저만의 방법으로, 때로 이런 좋은 일도 있게 합니다.

이 방법은 제가 일본에서 신간센으로 도쿄 - 오사카, 도쿄 - 히로시마등 장거리 이동중에 자주 써 먹는 방법중에 하나로, 전철이나, 기차, 심지어 비행기안에서도 옆자리의 사람과 쉽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방법중에 하나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3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옆자리의 이탈리아 여성 두분과 재미있게 대화를 하면서 나리타공항까지 오기도 했습니다.
제 옆자리에는 4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이탈리아 여성 2분이 앉아 있었는데, 제가 약간은 짖굿은 장난을 시작합니다.
노트에 영어로 "I like you"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라고 적어서 보여주면서, 이 표현을 이탈리아어로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니, 이탈리아어로 적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가 "I love you"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적어서, 이건 이탈리아어로 어떻게 말하는 지 물어보았고, 또 이탈리아아로 노트에 적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가 "Would you marry me?" (저랑 결혼해 주세요) 라고 적어서, 이건 이탈리아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물어보았더니, 그 두 분이 제가 농담 (장난)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Mr Kim, 결혼하자는 프로포즈가 너무 빠른 것 아니예요?, 포로포즈전에, Shall we dance? 라든지, Let's go to the movies" 등이 있어야 하는거 아니에요?" 라면서, 저의 농담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고, 한 분은 책을 쓰는 작가이셨고, 또 한 분은, 변호사이셨습니다. 두 분이 친구사이인데, 도쿄에 1주일 여행을 가는 길이셨습니다. 그 변호사이신 분이 그럽니다. 자기가 보기에 '인생은 이혼이다' 라는 것이었고, 왜냐하면, 자기가 매일 2,3쌍의 이혼을 상담하고 있다보니, 자기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분이 묵는 호텔은 신주쿠시내에 있는 'Keio Plaza Hotel'이었고, 저는 나리타공항 - 신주쿠역까지의 리무진버스를 같이 타고 그 호텔앞까지 안내해 드렸고, 그 두 분은 저와 헤어질 때 저에게 명함을 주면서 밀라노에 다시 출장 올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하셨죠.

이야기 (3)

저의 3주간의 성공적인 임무완수로 도쿄 - 나로야 구간 광케이블 설치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저는 다른 프로젝트를 맡아서 이 Softbank 프로젝트에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약 2개월후에 PM 부서의 부장 George 한테서 저한테 연락이 와서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도쿄 - 나고야간 광케이블과 구간구간에 설치한 신호증폭기를 도쿄 중앙운영센터에서 감시하는 감시 시스템도 설치하고 인수시험중인데, 인수시험중에 발생한 문제들중에 7개의 문제가 좀처럼 원인규명이 안되고 3주이상 지연되면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여러 시스템의 문제해결능력이 남들보다 탁월하다는 소문이 나 있던터라 George가 저한테 도와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7개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 담당 엔지니어 Kikuchi상에 그 문제에 대해서 이탈리아팀에게 보낸 이메일과 첨부자료등을 받아 살펴보니, 문제의 설명과 뭘 조사해 달라고 하는지의 조사의뢰의 요지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보고하고 3주가 지나도록 이탈리아팀에 전화 한번 안 하고 이메일로만 재촉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PPT에 이 문제가 발생한 시스템의 전체구성도와, 이 구성도안에서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원래의 A - B 구간의 케이블 문제인 것 같으니, 이걸 A - C 구간으로 by-pass 해도 부작용 (다른 문제)이 없겠는지의 답변의뢰의 요지를 명확히 해서 보냈고, 일본시간으로 저녁 (이탈리아 시간으로 오전)에 이탈리아 개발팀에 전화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빠른 회답을 부탁하자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와서, A - C 로 by-pass 해도 괜찮다는 답을 받아서 첫번째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두번째 문제도 담장 엔지니어 Sato-san에게 설명을 듣고, 이 두번째 문제에 대해서도 제가 다시 좀 더 자세히 설명한 PPT를 이탈리아 개발팀 Lawrence 에게 보내고, 일본의 낮시간 (이탈리아의 밤시간)에 Lawrence 에게 전화했습니다. 그러자 Lawrence가 자다 일어나서 "Oh, J5, 이 늦은 시간에 왠 일이야? 무슨 일야?" 라고 했고, 제가 "빨리 일어나서 내 이메일 열어봐. 급해", Lawrence 가 이메일을 보고, 문제을 이해하고, 저한테 "그럼, 시스템에서 이 log 를 봐봐, 혹시 거기에 이런 에러 메시지 있어?" 제가 확인하고, "어, 그 에러 메시지 있어", 그러자, Lawrence 가 "그럼, 이건 이런 문제이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될거야"라고 해결책을 줘서, 바로 두번째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Lawrence 에게 이탈리아의 심야시간에 전화해서 막무가내로 부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3주 이탈리아 출장중에 아주 친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번째 문제의 담당자는 미국 개발팀의 Hibin 임을 알고, 일본시간 밤 (미국시간 낮)에 전화해서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해결을 부탁하자 이 문제는 현지에 가서 서버의 데이터베이스를 다시 인스톨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호텔/비행기등 다 준비해 줄테니 언제 올 수 있는지 물어보고 최단시간으로 3일후라고 해서 준비해서, Hibin 이 일본으로 왔고, 저와 함께 밤샘으로 데이터베이스를 다시 설치하고 셋팅해서 복구시키는 것으로 세번째 문제도 해결. Hibin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앞으로도 자주 연락하자면서 친한 사이가 되서 돌아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2주안에 그 7개의 문제는 다 해결되어, 인수시험이 완료될 수 있었고, George 를 포함한 모든 멤버들이 저에게 고마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George 가 저에게 부탁을 합니다. "J5, 이 프로젝트가 다 끝날 때까지, 이 프로젝트와 관련한 이탈리아팀/미국팀과의 이메일 교신은 J5가 담당해 줘", 즉, 매일 매일 프로젝트에 발생한 문제나 질문사항들에 대해서, 일본의 각 담당 엔지니어들이 이탈리아나 미국팀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저한테 보내고, 제가 정리해서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식으로 외부와의 교신은 제가 맡아서 하는 역할을 그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했습니다.

즉, 프로젝트와 관련된 문제들을 인도팀이나, 이틸리아팀, 미국팀에 조사/해결을 부탁할 때, 내 입장에서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자료를 만들어서 보내는 것, 그리고 이메일로만 재촉이 아니라 전화해서 상대와 친분을 쌓으면서 부탁하고 도움을 받는 식의 융통성이 필요한 것이죠. 

2) 프리세일즈가 못하겠다고 한 프로젝트를 제가 상하이에 가서 도움을 받아내 성공시킨 이야기

이야기 (1)

당시 저는 서포트팀 (시스템의 유지보수)의 엔지니어로, 영업과 프리세일즈 (Pre-sales)가 하는 업무에는 제가 직접적으로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영업과 프리세일즈가 우리 회사 제품을 일본의 휴대폰 사업자 (Docomo, KDDI (Au), Softbank)한테 판매하기 위해서 제안서를 준비할 때는, 이 제품의 기능과 성능, 가격등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과 더불어, 도입할 경우의 support (유지보수)은 어떻게 제공할지에 관해서도 서술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시스템의 유지보수 경험이 많은 저희 팀에서 특히 제가 도와주곤 했었습니다. 보통은, 영업이나 프리세일즈의 질문에 답을 하거나,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정도이지만, 저는 이러한 제안서 작성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타 업체들과의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제안서 내용을 충실하게 만들고자 제가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또, 이러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내야, 시스템의 설치/시험등에 걸리는 1,2년후에 우리 서포트팀 (유지보수팀)의 프로젝트가 되기 때문에, 영업과 프리세일즈가 여러 프로젝트를 따내지 못하면 우리 유지보수팀의 1,2년후의 미래도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당시 일본에는 모바일 휴대폰 사업자로 Docomo, KDDI (Au), Softbank 와 더불어 일본만의 독특한 기술을 이용한 PHS 휴대폰 사업자 WILLCOM 이 있었고, IMS (IP Multimedia Subsystem) 라는 새로운 통신 기술 (음성과 영상, 대용량데이터등 모든 서비스를 IP기반으로 제공해 주는 서비스) 이 국제표준기구 3GPP 에 의해서 발표되면서, 이 기술을 기반으로한 새로운 통신 휴대폰 서비스에 관심들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WILLCOM은 PHS 휴대폰의 갱쟁력을 키우기 위해서 이 IMS 기술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에 관심이 많았고, 저희 회사의 이 IMS 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설루션인 IP-PBX 와 IP-VPN 서비스의 도입을 검토하고 싶으니, 기능과 서비스를 먼저 시연 (Demo)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우리 영업부 담당자 Sekine상은 이 Demo를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두 솔루션의 Demo를 위해서는, HW (server)를 여러대 구입해서 저희 회사의 IP-PBX 와 IP-VPN 서비스를 위한 각각의 소프트웨어의 설치및 기능시험이 필요했고, 그 비용이 꽤 많이 들기 때문에, 영업의 Sekine-san상은 미국 본사의 담당부서를 설득해서 약 1M$ (우리 돈으로 약 10억원)의 승인을 받아냈지만, 이 10억원으로는 외부업체로부터의 HW 구입과 우리 회사내 프랑스의 관련 부서로부터의 SW 구입 정도밖에 안되어, HW와 SW를 설치하고 기능시험을 할 2,3명의 엔지니어의 인건비와 Demo를 위한 자료준비와 전체 프러젝트의 진행할 TPM 1명의 인건비등은 아예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HW의 구입과 설치, 필요한 기능시험은 저희 회사 중국 상하이팀에 의뢰를 해야 했는데, 상하이팀에 필요한 인건비등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일본팀의 프리세일즈 우찌다상은 이러한 프로젝트를 자기는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리세일즈가 이 Demo의 기술적인 준비를 못하겠다고 하니, 고객에게 Demo를 약속한 영업의 Sekine상은 아주 곤란한 상황이었죠.

이 상황을 알게 된 저는, 이 Demo가 성공해서, 우리 고객 WILLCOM이 IP-PBX와 IP-VPN 서비스를 일본에 전개/상용화한다면, IMS 라는 통신의 신기술을 이용한 일본 최초의 서비스가 되는 것으로 우리 회사의 미래에도, 우리 서포트팀의 미래에도 큰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제가 상항이에 가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도와줄 수 있도록 설득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돈은 없으니 무료로 해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었죠).
물론, 저는 영업도 아니고 프리세일즈도 아니었기 때문에 제가 상하이에 가서 (프로젝트 돈은 없지만) 도와달라고 설득한다는 것은, 좀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이었죠.
영업과 저희 서포트부서의 부서장 나가타상도 승인해 줘서 제가 상하이로 가게 되었고, 저는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어떻게 설득할까 궁리를 하면서 갔죠.
도착해서 저희 회사 상하이 기술부의 실무진 약 20여명을 모아놓고 약 1시간가량 일본 휴대폰 통신시장의 전체 규모, 휴대폰 사업자 Docomo, KDDI (Au), Softbank 의 휴대폰 가입자수와 매출규모, 그리고, 일본 특유의 휴대폰 기술 PHS 를 이용한 휴대폰 서비스를 하고 있는 WILLOM 이란 회사의 가입자수와 매출규모등을 제가 만들어 간 PPT로 설명하고, 이 WILLCOM 이 왜 이 IMS 를 기반으로 한 신 서비스를 다른 3사 휴대폰 사업자들보다 먼저 도입하려는 지의 이유등, 그리고, 이번 Demo 를 성공시켜서 WILLCOM 이 본격 도입을 결정했을 때의 프로젝트의 규모가 어느정도는 될지, 그것이 미칠 파급효과등 그 기대치가 아주 크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만약에 이 Demo가 성공해서 정식 프로젝트로 이어질 경우, 제가 TPM으로서 프로젝트를 리드할 것이고, 그때, 내가 상하이팀과 할 것이고, 그때, 지금의 몇배의 보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프리젠테이션 했고, 그러니, 이번 프로젝트는 무료로 날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1시간의 저의 프리젠테이션을 마치고, 다음 1시간에는 과장/부장급들이 참여해 달라고 제가 부탁을 했고, 그들에게 이 Demo의 의미와 가치,기대치를 강조하면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들이 흔쾌히 무료로라도 도와주겠다고 결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기서 1주일간 머물면서 HW의 설치와 소프트웨어의 인스톨과 기본 셋팅까지 상하이팀과 같이 했습니다. 한가지 예를들면, 시스템의 110V AC 전원의 경우 콘센트타입이 중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제가 그걸 일본식으로 맞춰서 설치하도록 하는등의 미세조정등이 필요한 것이죠.

이제 여기 상하이 시스템실에서 준비한 시스템을 일본으로 shipping 해서 저희 부서내에 설치하고 가동시켜서 Demo 준비를 할 차례였죠. 이런 작업을 일본에서 하고, 실제 고객에의 Demo 자료 준비와 실제 고객에의 기능시연들을 위해서는 상하이팀으로부터 약 2명정도의 엔지니어가 일본에 와서 약 2개월이상은 도와줘야 했는데, 이 비용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는 또 다시 관련부서의 부서장에게 (비용을 대줄 돈은 없지만) 2명의 엔지니어를 2달정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번에도 흔쾌히 OK를 받아냈습니다.

제가 먼저 일본으로 돌아왔고, 약 1주일후에 시스템과 엔지니어가 와서, 저희 부서의 옆방에 시스템을 설치하고, 두 엔지니어가 일 할 책상등도 준비해주면서,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죠.
그날 저녁에 저는 이 두 중국인 엔지니어를 회사 근처의 한국식당에 데리고 가서, 삼겹살을 사주면서 많이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죠.

저는 이제 Demo를 총 지휘하는 PM/TPM 의 두 역할을 하면서, 매일 오후에 서프트웨어 기능시험을 위해서 도움이 필요했던 저희 회사 프랑스팀과 미팅을 하면서 준비를 해 갔습니다. 고객에게 어떤 기능을 중심으로 시연 (Demo)할 지, 그 기능들이 문제없이 잘 동작하는 지등을 다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IP-VPN은 저희가 준비한 시스템 단독으로 기능을 충분히 시연할 수 있지만, IP-PBX 서비스의 기능시연은 우리 시스템 단독으로는 안 되고, 저희 시스템을 고객의 렙 (Lab)에 설치해서 고객 시스템과 연동을 시켜야 필요한 기능을 시연 (Demo)할 수 있는 것으로, 문제는 우리 시스템과 고객 시스템을 연동 (Interface)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기술적으로는 인터넷 프로토콜이라고 하는 SIP (Session Initiation Protocol) 간의 연동으로, 우리 시스템의 SIP 프로토콜 스펙하고 고객 렙 시스템의 SIP 프로토콜의 스펙상에 같은 SIP 프로토콜이라고 해도, 사용하는 여러 파라미터가 다르기 때문에, 고객 시스템에서 사용하고 있는 SIP 프로토콜의 스펙을 하나하나 다 파악해서 우리 시스템에서 그것과 연동할 수 있도록 맞추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었죠.

그래서, 저는 고객으로부터 사용중인 SIP data 를 켑쳐 (capture) 해 받아서 몇일간 다 분석/파악한 후에, SBC (session board controller)라는 SIP 프로토콜 인터페이스 box 를 이용해서 연동시키도록 기술적인 준비를 했습니다.

2명의 중국 엔지니어가 온 지 첫 주말이 되는 날, 저는 그들에게 주말에 시내에 나가면 다 비싸니까, 토요일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고, 저는 토요일 점심 시간에 삼겹살 + 고추장 + 상추를 많이 준비해서, 방안에 신문을 펴고 버너를 놓고 삼겹살을 구워주면서 마음껏 먹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그 두명의 엔지니어가 저에게, 한 명은 중국 봉지라면을, 또 한명은 중국의 전통술 (병)을 주면서 주말에 후한 대접에 대한 보답이라면서, 이게 가지네가 저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저 같은 팀장은 처음이라면서, 뭔든 시키면 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IP-VPN 기능 시연에는 고객으로부터 영업사원, 기술부 부장님등이 올 것이고 그들은 이 서비스 기능이 처음인 만큼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하니, 시스템 화면을 보면서 설명하는 것에 더불어, PPT (파워포잍트)로 알기 쉽게 그려서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를 부탁했고, 두 엔지니어는 정말 성의있게 PPT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월요일 오후에 고객을 저희 사무실 lab에 초대해서, 오후 3시간 IP-VPN 기능을 성공적인 시연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IP-PBX 기능시연. 저희 시스템을 고객 렙 (Lab)에 가져가서 설치하고 인터페이스가 잘 되는지를 확인한 후 고객과 함께 기능시연을 했고, 이 또한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로서, 처음에는 충분한 비용이 없어서 프리세일즈가 못 하겠다고 하던 그 Demo를 성공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다음날 저녁에 2 명의 중국인 엔지니어를 데리고 신-오쿠보 한국인 거리에 있는 한국식당에 데리고 가서, 삼겹살로 대접하면서 그 동안의 서포트에 감사를 표했고, 두 2명의 엔지니어도 저와 함께 프로젝트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면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이로서, 처음에는 이 Demo 프로젝트를 수행함에 있어 필요한 인원에 대한 인건비가 없어서 프리세일즈가 못 하겠다고 한 것을 제가 성공시킨 것이었죠.

이야기 (2)

이 Demo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다음해 1월초, 사장님을 포함한 영업/프리세일즈의 그 해 한해 영어전략회의에서, 영업사원 Yoshida상이 손을 들고 사장님께 건의를 하게 됩니다. "프리세일즈도 포기한 그 Demo를 J5상이 혼자서 상하이에 가서 모두를 설득해 도움을 받아내면서 성공시켰는데, J5상 같은 사람은 서포트팀 (유지보수팀)에서 엔지니어로 있기보다는 프리세일즈로 와서 활약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사장님께서 바로 제 윗 사람 나가타상에게 전화를 해서 J5를 프리세일즈로 보내줄 수 없겠냐고 했고, 나가타상은 저에게 사장님으로부터 이런 전화가 왔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했고, 저는 나가타상이 제 윗사람이니 나가타상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고, 결론은, 제가 계속 서포트팀 (유지보수팀)에 있으면서 50%는 프리세일즈팀을 도와주는 걸로. 대신, 저의 매월 비용의 50%는 프리세일즈팀이 커버한다는 조건으로. 
그래서, 저는 서포트팀의 엔지니어 역할도 하면서 동시에 프리세일즈팀의 일도 도와주는 역할을 1년넘게 했습니다.

PS: 그 Demo후에 WILLCOM은 IMS 새 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IP-PBX, IP-VPN 서비스의 기술적인 검토끝에 다른 휴대폰 사업자들보다 먼저 IP-PBX, IP-VPN 서비스를 도입하여 경쟁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너무 일찍 도입함으로서 기대만큼의 수익성 확보가 어려울 수도 있는 risk도 크다고 판단해서 사업추진을 한 2년이상 연장하게 되었고, 저는 그 사이에 완전히 다른 프로젝트로 이동해서 더 이상 관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PS: 제가 이토록 영업/프리세일즈의 새 제안서작성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서포트팀이 부서장이던 나가타상은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좀 지나치게 많이 도와준다/관여한다는 거였지요. 당시 저희 회사는 매년 봄에 전년도 업무평가를 해서 그 평가 점수에 따라서 보너스를 주었는데, 평가는 예를들어, well done (잘 했음 - 보너스 100% 지급), excellent (우수함 - 보너스 120% 지급), outstanding (아주 탁월함 - 보너스 150% 지급). 보통 각 부서 책임자가 그해 부서원들에게 지급할 수 있는 보너스액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인원에게 120%, 150%를 줄 수는 없는 것이었죠. 예를들어 100명이 있다면, 90명 정도가 100%, 7,8명 정도가 120%, 1명정도가 150% 정도이죠.
특히, 150% 평가를 주는 대상에 대해서는, 부장에게 왜 이 사람에게는 특별히 150%를 주는지 설명해서 승인을 받아야했죠.

참고로, 이 업무평가는 1년에 한 번 주는 보너스에만 반영되는 것으로, 연봉인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평가입니다.

나가타상은 거의 6,7년간 저는 위와 같은 활약 (영업/프리세일즈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을 업무평가에 반영해 주지는 않았고, 보통 well done 정도의 평가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회사가 더 큰 통신회사에 합병되는 일이 있었는데, 두 회사가 합병하면서, 사원들의 모티베이션 진작을 위해서 위의 평가등급에 따라서 보너스뿐만 아니라, 특별히 연봉인상에도 반영해 주겠다는 발표가 났고, 이때 나가타상이 저에게 outstanding 의 최고의 평가를 해 주면서, 그 이유중에 하나에 제가 그동안 영업/프리세일즈의 제안서 작성등에 아주 크게 참여/기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저는 보너스 150%와 더불어 연봉도 오르는 보상을 받았죠.

역시 부서과 회사를 위하는 진정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하는 행동에는 언젠가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저는 그때 그 경험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3) 저희 회사 서포트 (유지보수)팀의 서포트에 크게 실망했다면서 그해 한 해 연간 유지보수 계약(약 10억원)을 하지 않겠다는 고객 WILLCOM의 과장님을 설득해서 연간 계약을 하게 한 이야기

이야기 (1)

당시 WILLCOM 의 PHS 휴대폰 서비스는 저희 회사 미국 개발팀이 개발한 SCP (Service Control point)라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일본 전국의 가입자에게 제공하고 있었고, 이 SCP는 가입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가입자의 초기 인증, 가입자의 위치정보등 PHS 휴대폰 서비스의 핵심 정보를 가지고 있는 시스템으로 도쿄와 마쯔모토 두 곳에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었고, 저희 회사와 연간유지보수 계약을 통해서 뭔가 문제가 있을 때는 저희 회사 서포트팀의 신속한 원인규명과 문제해결의 대응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이 SCP 시스템의 접속망의 프로토콜이 좀 구식의 X.25 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 회사 서포트팀에서 이 구식 프로토콜을 잘 아는 엔지니어는 코바야시상 한 사람이었습니다. 
몇년간 좋은 서포트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 가을, 우리 SCP 와 X.25 프로토콜로 네트워크상에서 연동하고 있는 KDDI 시스템간에 문제가 생겨서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X.25 프로토콜 관련 조사이다보니 조사에 시간이 걸렸고, 특히, 그 사이에 쿄토에 게신 코바야시상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코바야시상이 1주일 이상 휴가를 내면서 조사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중간 중간 조사결과 내용도 정확하지 않는등의 문제가 겹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한 문제의 원인규명과 해결에 약 3개월의 시간이 걸렸고, 고객의 담당부서 과장이던 와타나베상이 크게 실망하고 화가나서 그 다음해 초에 그해 연간유지보수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건 정말 크게 화가나서 그런 것으로 연간 유지보수 계약을 안 하면 SCP 시스템의 안정운영을 보장할 수 없는 것으로 현실적으로는 계약을 꼭 해야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와타나베상이 너무 실망하고, 화가 나서 연간계약 견적서를 준비하는 우리 회사 영업부에게 못 하겠다고 화를 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 서포트팀을 떠나서 다른 PM (Project Management)의 업무를 맡고 있었기에 제가 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제가 PM부서로 옮기기 전까지는 여러개의 WILLCOM 프로젝트를 하면서 고객의 와타나베상과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제가 아는 와타나베상은 아주 조용하고 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낸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갈 만큼 놀라웠습니다. 즉, 얼마나 실망하고 화가 났으면 꼭 해야 하는 연간 유지보수 계약을 안 하겠다고 하는 걸까? 라고 생각했고, 저도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내가 나서서 와타나베상의 화를 풀어주고 연간유지보수 계약을 하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저희 회사 담당 영업사원과 함께 와타나베상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영업사원은 그 해 연간 유지보수를 20% 싸게 해도 좋다고 제안 했지만, 와타나베상은 꿈쩍도 하지 않고 필요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엄청 실망했고 화가 나 있음을 확인하고 2주후에 다시 찾아뵙겠다고 하고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회사로 돌아온 저는 매일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저는 매일 출퇴근 전철안에서 당시 KT (Korea Telecom) 부사장이셨던 조서환님이 쓰신 '모티베이터'라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출근하는 전철안에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의 내용에서 그 문제 해결의 영감이 떠올랐고, 저는 사무실에 도착하면 그 떠오른 영감을 바탕으로 PPT를 매일 한두장 만들어 갔습니다. 
그때 이 책에는 'There is a problem, there is a solution'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책도 있다), 이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저는 이 문장을 바탕으로, PPT 왼쪽 위에는, 'There is a problem'을 적고, 그 밑에 우리 서포트팀이 잘 못한 점들, 왜 이 문제 조사에 3개월이나 걸렸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즉, 우리가 실수한 점들, 고객을 실망시킨 요인/원인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적었던 것이죠. 그리고, PPT 오른쪽 위에는 'There is a solution' 을 적고, 그 밑에, 우리가 뭘 개선하면 되는지, 우리가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어떤 실력을 키워야 하는지, 특히 X.25 프로토콜에 대한 지식을 고바야시상 한 사람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팀내 사또상도, 후지상도 충분히 공부하도록 교육시킨다, 등의 개선안을 구체적으로 세워서 PPT에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서포트팀의 멤버인 사토상, 고바야시상, 후지상 세 사람과 매일 저녁에 이 문제의 대응에서 실수한 점들을 같이 얘기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 엔지니어에게 각자 고객 와타나베상에게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마음의 사과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2주후 와타나베상과의 미팅 시간은 오전 10시였고, 저는 9시에 고객 사무실 근처 카페에서 준비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그 조용하고 젊잖은 와타나베상이 얼마나 크게 실망했으면 그렇게 화를 낼까, 를 생각하니, 1시간 기다리는 동안, 저도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정말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그 미팅에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눈물을 참고 미팅에 들어가서, 와타나베상에게 제가 준비한 PPT로, 우리가 뭘 잘 못 했는지, 그리고 어떤 점을 개선할 것인지를 설명드렸습니다.
그러자, 와타나베상이, 이런 상투적인 말과 개선책은 필요없다면서, 제가 준비해 간 PPT를 내던지셨습니다.
그때, 제가, "예, 맞습니다. 이런 PPT가 뭐 필요하겠습니까?" 하면서, PPT를 찢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말했습니다. "와타나베상,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단 한마디입니다. 실망시켜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저희 서포트팀 멤버 고바야시상, 사또상, 후지상도 모두 '실망시켜드려 죄송하다'는 마음으로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각자가 와타나베상에게 사과의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면서, 3명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그랬죠. "와타나베상, 두번 다시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믿고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요. 저희 서포트팀 모두, 열심히 교육하고 실력 키워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한 번 기회를 주세요, 혹시 또 이런 실망스러운 일이 또 한번 발생하면, 내년에 정말 연간유지보수 계약 안 하셔도 좋습니다. 이번 한번 만 기회를 주십시요"

그러자, 와타나베상의 굳은 표정이 쫙 풀리면서, "김상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사실 이번 문제의 조사 건은,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는 상대회사 KDDI와 연관된 문제로, 문제 조사과정에서 너무 시간이 걸린 점이나, 또 중간중간 문제 조사 결과가 정확하지 않아서, 귀사의 서포트팀의 조사 결과를 믿고 저는 KDDI에 보고 하곤 했는데, 정확하지 않아서 정말 난처했습니다. 우리 회사 내부의 문제라면 상관없는데, 이렇게 상대 KDDI로 부터 지적을 받았으니, 제가 얼마나 곤란했겠습니까? 그런 점이 정말 힘들었고, 그래서 제가 화가 났던 것입니다". "김상이 이렇게까지 이해해주시고, 반성과 개선책을 마련해 오셨으니, 알겠습니다. 이 개선책의 구체적인 실행에 관해서는 추후 미팅에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그러자, 같이 참석한 저희 회사 영업사원이 20% 깍은 연간유지보수비 견적서를 와타나베상에게 건네려 하자, 와타나베상이 "20% 깍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 가격으로 견적서 제출해 주세요".

미팅이 끝나는 시점에서 제가 와타나베상에게 한 10분만 단 둘이서 얘기하고 싶다고 부탁을 했고,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다 밖으로 나가고, 저와 와타나베상 둘이 있는 자리에서, 제가 와타나베상에게 "이번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서포트팀의 팀장 사또상이 여러면에서 실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생긴 문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와타나베상도 이 점은 잘 알고 게실겁니다. 제가 회사에 돌아가서, 팀장을 바꾸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좀 기다려 주세요", 그러자 와타나베상이 "예, 그렇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는 회사로 돌아와서, 이번 건에 대해서 서포트팀의 부서장이 알면, 서포트팀의 팀장 사또상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다음날 아침 회사근처 카페로 사또상을 불러서 와타나베상과의 미팅 결과를 설명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으니, 팀장에서 내려오라고 제안했습니다. 안 그러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걸 막을 방법으로 일단 팀장에서 내려오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사또상은 상황을 이해하고, 팀장에서 내려오겠다고 했고, 저는 다음 팀장으로, 실력도 좋고, 고객으로부터의 신뢰가 높은 후지상을 불러서 팀장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와타나베상에게 전화해서, 상황보고를 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 되었습니다.

PS: 그 다음주에 제가 마련한 개선책에 대해서 고객팀과 하나 하나 얘기하면서, 서로 어떤 점을 도와주면서 개선안을 실행할까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합의해서, 우리 서포트팀과 고객 운영팀 멤버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야기 (2)

저는 이 문제해결의 영감을 준 책 '모티베이터'의 출판사에 이 경험을 적어 보냈고, 출판사는 책의 저자 조 서환님께 알렸고, 조 서환님은, 책을 읽고 감동했다는 독후감은 많이 받아봤지만, 본인의 책을 읽고 10억원을 구해냈다는 이야기는 처음이라면서, 저의 글을 본인의 블로그에 올리도록 하셨고, 저에게 서울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 책을 선물해 주셨던 당시 경찰대학교 학생과장님께도 저의 경험을 보내드려서, 그 후에 제가 서울에 갔을 때, 출판사 사장님/조 서환님/경찰 대학교 학생과장님과 저, 4명이 함께 만나기도 했습니다.

4)신-오사카 신간센 역안에서 휴대폰 2대로 5시간동안 원격으로 시스템의 문제 대응한 이야기

당시 저회 회사 제품중에 STP 라는 시스템이 KDDI 히로시마 사이트에 설취되어 가동중이었고, 시스템의 문제 조사나 SW upgrade 등이 있을 때마다, 도쿄에서 신간센으로 약 4시간 걸려서 히로시마 고객 사이트에 가서 철야작업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날도, 히로시마 사이트에서 전날 밤샘작업을 하고, 아침 9시에 KDDI 담당자가 출근하자, 저는 밤샘작업으로 문제가 고쳐졌음을 고객 담당자에게 확인시키고, 고객 담당자로부터 도쿄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당시 저와 같이 간 제 팀원 사또상과 함께 히로시마 신간센역으로 와서, 아침밥을 먹고, 신간센으로 도쿄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저희 회사 도쿄 사무실에서 제 윗사람 오히라상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KDDI 히로사마 고객으로부터, 어젯밤 작업한 시스템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이 왔으니,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가서 문제대응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침에 고객 담당자하고 전날밤 작업이 잘 끝났음을 확인하고 도쿄로 돌아가는 길인데, 이상하다고, 하면서, 제가 히로시마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확인해 보고, 다시 돌아 갈지 어떨지 결정하겠다고 하고, 일단, 다음 신간센 역인 신-오사카역에서 내렸습니다. 고객에서 전화해보니 역시 문제가 발생했음을 확인한 저는, 이 급한 상황에서 신간센으로 히로시마로 돌아가려면, 최소한 2시간은 걸릴 것임을 고려해서, 그냥 신-오사카역 내에서 내 휴대폰과 팀원 사또상 휴대폰 2대를 가지고 원격으로 대응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휴대폰 하나는 왼손에 들고 고객과 일본어로 통화하면서 문제의 상황을 파악하고, 또 한대는 오른손에 들고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개발팀과 영어로 통화하면서 지시를 받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몇시간 하기 위해서는 휴대폰을 계속 충전해 가면서 해야 했기 때문에 저는 제 팀원 사또상에게 이 신간센역 안의 여러 기념품 판매가게나 식당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돈을 1000엔이드 2000엔이든 지불할테니, 휴대폰 충전을 허락해 주는 곳을 찾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사또상은 3,4군데 가보더니, 돌아와서 허락해 주는 곳이 없다고,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또상에게, "사또상, '이건 해봤는데, 안되겠어요', 가 아니라, 무조건 충전을 허락해 주는 곳을 꼭 찾아내야 하는 거야. 이건 옵션이 아니라, must 야, 안 그러면, 휴대폰으로 30분정도 통화면 밧데리 끊어질텐데, 무조건 충전을 허락해 주는 곳을 찾아내야 하는 거야. 알았어, 내가 할께" 라고 말하고, 제가 직접 역안의 모든 선물가게, 식당등을 찾아다니면서 충전을 부탁을 했습니다. 역시, 거의 모든 곳이 허락을 안 해 주었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다녔고, 드디어, 어느 작은 도시락과 음료수 판매 자판대의 점원 아가씨가 "오늘은 사장님이 안 나오시니까, 충전하셔도 괜찮아요"라고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휴대폰 2대를 충전해 가면서, 왼쪽손으로는 고객과 일본어로 통화하고, 오른손으로는 미국 개발팀과 통화하면서, 낮 12시쯤부터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오후 4시경에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저는, 중간에 (이 자판대의 매상을 올려주기 위해서) 사또상한테 도시락 10개와 음료수 10개를 일부러 사도록 했고, 오후 4시경에 문제대응이 마무리 되었을 때, 저는 저쪽에 있는 기념품 판매 가게에 가서, 제일 크고 좋은 고급 과자 선물셋트 (4500엔정도)를 사서 그 판매대 점원 (아가씨)에게 주고, 충전을 허락해 준 덕분에 원격으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었다며, 정말 감사했다고 인사를 하고, 도쿄로 돌아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해 봤는데, 안되겠어요" 가, 아니라, "무조건 찾아내야하는 거야, 이건 must 야" 라며, 제가 직접 찾아나서서, 마침내 충전을 허락해 주는 곳을 찾아낸 이야기인 것입니다.

5) 회사에서 일 잘하는 비결
  팀장으로서 (1)

a. 미국본사에서 출장 온 직장동료와 개인적인 친분을 만든다

저는 회사내에서 오래전부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남다르다', '문제해결 능력이 탁월하다'라는 평가를 받아 왔는데, 그 비결은 사람들은 모르는 저 만의 전략이 있어서 입니다.
그 한 가지가 저희 회사 미국이나 독일등에서 출장온 동료와 남들은 모르는 개인적인 친분을
만드는 것입니다.
보통 저희 일본 지사 (Tokyo)에 3,4일에서 1,2 주 정도 출장을 오는 경우,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 토요일에는 보통 가 보고 싶었던 시내의 여러 곳을 구경다니지만, 일요일 오후나 저녁에는 시간이 있는게 보통이죠. 이 점을 아는 저는 금요일 오후쯤에, 일요일 저녁에 시간 있어? 라고 물어보고, 저녁같이 하자고 제안하죠. 거의 99% 시간이 있죠.
보통, 신-오쿠보 한국인 거리의 한국식당에 데려가서 '삼겹살'을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대화를 하게 되면서, 가족상황, 취미 등에 대해서 대화하게 되죠.

보통, 오랜만에 일본에 와서 돌아갈 때, 딸에게, 아내에게 사 갈 선물을 어디서 사면 좋은지, 딸이 특별히 사오라고 한 선물 목록을 보여주면서 어디서 사면 좋은지를 물어보죠.
그러면, 저는 식사후에 시내 큰 백화점이나 쇼핑시설의 선물코너에 데리고 가서 선물을 고르고 사게 해 주죠.
이렇게 일요일 저녁의 3,4시간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 회사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우리 둘 만의 개인적인 친분을 만들게 되는 것이죠.
다음날 월요일에 출근해서 평소처럼 일을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부탁도 들어줄 개인적인 친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죠.
그가 출장을 마치고 돌아간 후에, 업무상으로 우리 일본 프로젝트에서 그의 도움이 필요할 때, 예를들어, 그의 부서가 담당하고 있는 시스템 (Lab) 시스템을 몇일간만 일본 프로젝트에서 사용하게 해 달라고 할 때, 그 부서에서 미국 프로젝트에서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에는 어렵다고 할 때, 저는 일본시간 밤 (미국시간 낮시간)에 그에게 전화해서, 미국 프로젝트에는 최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몇일간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고, 그는 최대한의 융통성을 발휘해서 제 부탁을 들어주게 되죠.

보통, 다른 사람들읒 미국팀이나 다른 해외 지사나 본사에 이메일로 업무상의 부탁을 하게 되고, 상대가 어렵다고 하면, 이메일로 거듭거듭 부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식으로는 상대의 도움을 받아내기 쉽지 않죠. 그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보통 저인데, 그건, 저는 밤에 개인적으로 그에게 전화해서 부탁할 개인적인 친분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예1> 당시, 광장비 프로젝트의 PM으로 미국 본사에서 출장 온 John과도 일요일 저녁에 같이 둘만의 식사를 하면서 얘기하는 과정에서, 그의 취미는 마라톤이고, 평소 마라톤 동호회 멤버들과 매주 2,3 회의 러닝 운동을 하고 있으며, 보스톤 마라톤, 시카고 마라톤등에도 매년 참가한다면서 사진을 여러 장 보여줬습니다.
당시 그 해의 보스톤 마라톤의 골인 지점에서 폭탄 폭발 사건이 있었는데, 자기가 골인하고 몇분후였다면서, 정말 아찔했던 순간의 경험도 얘기해 주었습니다.

저도 마라톤에는 관심이 많았던 터라서, John으로부터 마라톤에 좋은 신발을 추천받았고, 또 평소 어떻게 연습을 하는지, 시합 당일날은 어떤 마음자세로 뛰는지등의 구체적인 조언을 들어서, 저는 저녁식사후에 John과 함께 신주쿠 시내 스포츠용품 가게에 가서 John이 추천해 주는 마라톤 선수용 신발을 샀고, 다음날 아침부터 바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일요일 저녁의 이런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 다음날 월요일부터 John과 저는 만나기만 하면, 마라톤 이야기를 하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당시 광장비 프로젝트의 일본 담당자였던 저와, 미국 본사에서 이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관리를 하고 있었던 John과는 정말 원만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2> 당시 일본 프로젝트에의 시스템 설치는 미국팀의 Installation팀 전문가가 와서 설치하곤 했는데, 그 시스템의 설치 장소 확인과 더불어 필요한 전기선이나 Lan 케이블 (cable)의 설치경로와 케이블의 길이와 량 등의 사전 조사를 위해서 엔지니어가 오는 데, 그 때도 미국에서 Michael 이라는 젊은 엔지니어가 5박 6일 일정으로 금요일에 왔고, 저는 신주쿠 전철역으로 그를 마중하러 가서, 만나서 전철을 타고 약 1시간 거리의 저희 사무실로 오는 전철안에서, 그가 이번에 오기 힘든 상황인데 왔다는 얘기를 듣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입원중인데, 배속의 아이가 꺼꾸로 들어선 상태라서 출산이 좀 걱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딸이 있고, 두번째 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도착해서, 그가 출장중에 사용할 휴대폰을 주면서, 원래 국제전화는 못 쓰게 되 있는데, 제가 특별히 허락하는 것이니까, 미국의 아내와는 얼마든지 쓰라고 했고, 일요일 저녁에 같이 식사하자고 해서, 그가 흔퀘히 그러자고 해서, 일요일 저녁에 신-오쿠보 한국식당에 데리고 가서, 삼겹살을 먹으면서 대화를 했는데, 그때가 12월 중순이었기 때문에, 돌아갈 때, 딸과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가고 싶다는 것이었고, 저는 식사후에, 신주쿠 시내에 있는 백화점 9층의 디즈니랜드 선물코너에 데리고 가서, 선물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월요일부터 그는 제 팀의 엔지니어 고바야시상하고 같이 시스템을 설치할 히로시마와, 마쯔모토 두 곳에 가서 현장조사를 해야 했는데, 저보고 최선을 다해서 잘 하겠다고 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두 곳의 현장조사를 마치고 수요일 도쿄로 돌아온 그는, 수요일 저녁에 저와 저녁을 같이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고, 당시 저는 시내 본사에 있던 터라, 저의 기술부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꼭 저와 저녁을 같이 하고 싶다고 해서, 좀 늦었지만 제가 기술부로 돌아가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는, 저한테, 많이 도와줘서 고마웠다면서, 앞으로도 제가 하는 프로젝트라면 언제든지 올테니 연락하라면서, 현장조사 결과는 제가 부탁한데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미리 정리해서 저에게 보내주겠다고 했고, 한가지 저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자기가 돌아가서 아내가 아기를 출산하면 그 아이 사진을 저에게 가장 먼저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약 3주후에 그로부터 갓 태어난 아이의 사진이 왔고, 다음에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b. 상대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대응한다

제가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저희 회사는 미국 텍사스 달라스 Plano 에 본사가 있는 DSC라는
통신 시스템 (HW, SW) 제조회사였고, 저희 일본 사무실은 이 DSC의 일본 지사로, 영업과 기술 서포트팀 (유지보수팀)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통신사업자 KDDI (Au) 와 Softbank, DoComo 등에 많은 프로젝트가 있었고, 이런 고객에 설치되어 운영되는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그 원인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미국의 개발팀에 많은 질문을 하게 되고, 그들과 많은 회의등을 하게 되죠. 문제는, 어떤 소프트웨어의 문제에 대한 일본팀의 질문등에 개발팀 (R&D)의 모두가 다 알기 쉽게 친절히 대답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R&D 베테랑이고 실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그리고, 나이가 좀 든 사람일수록, 대답이 전문기술 용어를 사용한 짧고 간단하며, 또 그의 질문도 짧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의 질문에 대해서 가능한 한 즉각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성격이 급하고 명확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것이죠. 이런 경우, 그의 전문기술용어를 사용한 짧고 간단한 대답이나, 그의 질문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걸 때, "미안하지만, 너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고, 질문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처음부터 대답을 해 버리면, 그는 이쪽의 사정을 이해해 주기보다는, 답답해 하면서, 관련된 XXXX 라는 시스템 메뉴얼 읽어 봤냐고 하면서, 이 정도로 모르면, 그 메뉴얼부터 읽어보라고 하면서, 더 이상 상대를 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R&D 개발자는 처음부터 알기 쉽게 잘 설명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개발자일수록 상대가 어느 정도는 기술적인 지식을 갖고 있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죠.
너무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한다고 판다하면 답답해 하는 경우가 많죠.

이렇게 상대가 성격이 급하고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그의 기술적인 설명과그의 질문의 내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잘, 모르겠다' 라고 하지 말고, 가능한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이해해서, 어느정도 그의 수준에 맞게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고자 해서, 처음부터 너무 모른다, 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식으로 그의 스타일에 맞춰서 대응해야 하는 것이죠. 처음에 이런 식으로 대응을 하면, 그도 이쪽을 자기의 스타일에 맞는 상대로 인식하고 그 다음부터는 훨씬 더 부드럽게 대응해 주게 됩니다.

저의 일 현장에서 많은 일본인 엔지니어들은, 이런 상대의 성향/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너의 기술적인 설명이 이해가 안 간다. 너의 질문이 이해가 안 간다' 라고 하고, 또, 그가 그럼 관련 메뉴얼 XXXXX 읽어봤냐고 하면, 단순히, '안 읽어봤다' 라고 대답을 하는데, 그럼, 그는, 최소한 XXXXX 메뉴얼 정도는 읽어보고 질문하라고, 하면서 더 이상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미국이나 인도등의 개발팀과 기술적인 질의응답을 할 때는, 처음 단계에서 가능한 한 그의 일하는 스타일 (성향/성격)을 파악해서, 대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c. 상대가 왜 우리 부탁을 안 들어주는 지 그 이유를 파악해서 공감해 준다


continue....

2024/06/30

제가 영어공부한 이야기

여러분,  21세기 세계화/정보화를 사는 우리가 꼭 갖추어야 할 실력중에 하나인 영어실력, 저는 다행히 고등학교때부터 영어하나만은 열심히 한 덕분에 대학졸업후 한국통신에 취직해서 미국 회사와의 여러 프로젝트에서 남다른 활약을 할 수 있었고, 미국회사를 거쳐서 일본에 있는 미국계 통신회사에서 지금까지 20년 이상 일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왜, 대학졸업하기 전에 다른 건 몰라도, 영어실력 만큼은 꼭 갖추어야 하는지 독자 여러분께 제 이야기가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영어실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 각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경쟁력이며, 영어실력이 있어야 여러 해외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고, 그것이 
곧 연봉으로 이어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목차

1) 고등학교 3년간
    - 학비무료 & 기숙사 생활, 대신 졸업하면 하사관으로 5년 근무조건
    - 성문종합영어로 단어찾아 노트에 적기부터 시작 
2) 군대 (공군) 6년간
    - 야간근무후 내무반에서 자는 대신, 미군 셔틀버스 타고 회화현습
    - 매일 아침 '곽영일의 생활영어' 라디오 듣기
3) 한국통신 3년간
     - 600억원의 프로젝트에서 인수시험 최종 실패판정 일보직전에 구해낸 이야기
     - Mr Kim, You look like Johnny Five.
4) 미국 Atlas Telecom 회사에서 3년간
     - How much do you want? 연봉 얼마든지 줄테니 우리 회사로 와 달라는 스카우트 제의
     - 연봉 1100만원 -> 4500만원으로
5) 일본에 있는 미국계 통신회사에서 지금까지 20여년간
    a. 2년간 매일 새벽 5시반부터 3시간 맥도날드에서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한 이야기 
    b. 일본 고객과 미국 개발팀간의 전화회의에서 일본어 - 영어 통역을 해야 했던 상황
    c. 특별승진 한 이야기
        특별승진 (1)  
        특별승진 (2)
6) 영어실력 + IT 엔지니어 경력자는 한달에 130만엔 (약 1300만원)까지도
    - 하지만, 이 두 가지 요소를 갖춘 엔지니어를 찾는 건 하늘에 별따기인 게 현실
7) 카나다의 영어교육기관에서 실시한 우리 부서내 '영어 말하기' 실력평가 인터뷰이야기
    - 김상이 1등입니다.
8) 일본에서 중국어 공부한 이야기
     이야기 (1) 매주 토요일 오후 2시간 개인래슨으로 중국어 발음을 철저공부
     이야기 (2) 일본 오비린 대학의 중국어 교수님께서 저의 중국어 발음을 극찬
     이야기 (3) 신주쿠에 있던 Hao 라는 중국어 학원 망년회에서 제가 선생님께
                    중국어로 쓴 감사의 편지를 90여명 앞에서 큰 소리로 읽음
     이야기 (4) 일본인 아사미상에게 중국어 발음을 개인래슨, 그리고 친한 친구가 됨

구체적인 내용

1) 고등학교 3년간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의 시골 국민학교에서 5학년때부터 학교대표 축구부와 장거리 (초등학생의 장거리는 200m 트랙을 5바퀴도는 1000m) 육상부 선수로 운동을 했고, 같은 군내의 중학교에 가서도 학교대표 축구선수를 하던 저는, 중학교 2학년 어느 겨울방학 밤 시골집의 방에서 제 왼쪽에 있는 형이 내후년 봄에 대학에 가고, 나는 고등학교에 가고, 동생은 중학교에 가야 되는데, 우리집에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셋이서 같은 해 봄에 대학, 고등학교,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지? 안되겠다, 내가 빠지자. 라고 아무와도 상의없이 저 혼자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이 된 저는 봄부터 학비가 전혀 안드는 고등학교는 없나 찾기 시작했고, 당시 한국에는 군대에서 운영하는 '공군기술학교', '금오공업고등학교', '구미기술고등학교' 등이 있어서, 이들 학교는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고 학비는 전액 무료인 대신에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가서 하사관으로 5년간 복무한다는 조건의 특수 공업고등학교가 있음을 알고 저는 금오공고에 가기로 마음먹고, 축구부를 그만두고 3학년 여름방학때부터 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10월달에 있던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고등학교는 대구옆의 구미에 있던 금오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저는 제가 중학교 2학년 어느 겨울방학 밤에 저 혼자서 결심했듯이, 고등학교때부터는 부모님께 금전적으로 전혀 부담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었고, 대신 집을 떠나 멀리 구미에 있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죠. 

입학시험 직전에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시험에 합격했을 때, 제 중학교 3학년 수학 담임 선생님께서는 제가 공업고등학교에 간다는 것을 결사 반대하셨습니다. "너는 인문계로 가서 교수가 될 타입이야, 니가 왜 공고를 가, 일반 고등학교를 가", 라고 저와 부모님을 설득하셨지만, 저는 차마 집에 돈이 없어서 그런다는 말씀은 못 드리고 금오공고로 갔고, 저는 전자과로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수학 선생님 말씀대로 전자과 수업은 너무 제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전혀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멍하고 있는 날들이 이어졌고, 저는 뭐 다른 거 뭐 할 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우연히 제 짐에서 당시 아주 유명했던 '성문종합영어'라는 꽤 두꺼운 종합영어학습서를 집어 들게 되었고, 이 책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왜, 어떻게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일단은 모르는 단어를 찾아 노트에 적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전자과 수업시간에는 멍하고 있다가, 저녁을 먹고 당시 군대식 학교인 만큼 한 내무반에 10명, 10명 20명씩 앉아서 9시까지 각자의 책상에서 자습 (공부)하고 9시부터 10시사이에 군대식 점오, 그리고 밤 10시에는 모두 취침을 하게 되는데, 저는 그때부터 혼자서 도서관에 가서 성문종합영어의 긴 영어지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 노트에 적기 시작했습니다. 밤 12시까지 하고 내무반에 돌아와서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도서관에 가서 6시까지 공부하고, 돌아와서 6시에 모두와 같이 이불을 개고, 운동장에 나가서 아침 운동을 하는 것으로 그날의 일과를 남들과 똑같이 시작하는, 이런 일과를 매일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성격 만큼이나, 수업시간에도 조용한 그런 저였고, 단지 남들과 다른 것은, 밤 10시에 혼자서 도서관에 가서 12시까지 영어공부하고 (단어 찾아서 노트에 적는 것), 다시 새벽 4시에 도서관에 가서 6시까지 공부하는 것. 당시 금오공고는, 학력고사를 봐서 우수 성적의 학생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서 50명 금오공대에 ROTC 로 갈 수 있는 혜택이 있었고, 약 300명정도의 졸업생들중에 공군 50명, 해군 50명, 그리고 나머지는 육군이어서, 공군도 지원자가 많으면 성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학력고사를 준비하도록, 제2 외국어 과목으로 일본어 수업 (원어민), 영어수업등도 비중을 두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2학년이 되니까, 모두들 영어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영어의 to 부정사가 뭔지, 동명사가 뭔지는 윤태한테 물어보면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 서서히 존재감이 드러나게 되었고,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험만 보면 1등하는 머리가 좋은 일동이 (김 일동)가 있었는데, 영어만큼은 일동이도 저한테 물어봤습니다. "윤태야, 동명사가 뭔지 니가 설명해 준 덕분에 영어시험에서 3문제나 맞았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친구들사이에서 도는 또 한가지 소문은, '3년간 윤태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을이 되면 쓰러져서 구미 순천향병원에 실려가곤 했는데, 의사 선생님 진찰결과는 '과로'였고, 좀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때면, 저는 저녁 모두가 내무반 책상에 앉아서 자습하는 동안 저 혼자 침상에 누워서 혼자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면서 듣던 팝송이 Melanie Safka 가 부른 The saddest thing 이었습니다,

And the saddest thing under the Sun above
is to say good-bye to the one you love....
...... 

저는 전자과의 전공 과목이나 다른 과목들의 성적은 별로 였지만,
영어만은 자신이 있었던 덕분에 나름 자신있게 학력고사를 보았고, 저는
50명만 갈 수 있는 공군에 지원해서 고등학교 졸업후 바로 공군에 하사관으로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년간 매일 밤과 새벽에 한 영어공부는 그 긴 성문종합영어 지문의 단어를 노트에 적어가며 외우는 것과, 문법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영어 회화(말하기)는 군대 (공군)에 가서 하게 됩니다.

2) 군대 (공군) 6년간

고등학교 졸업식장에 공군 관계자가 와서, 5일간의 휴가증을 주었고, 저는 짦은 몇일간이나마 서울 삼양동 미아리 산동네 꼭대기에 있던 허름한 집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3일간을 보낸후 바로 대전에서 14주간 기초 전자 교육을 받고 수원 비행장으로 배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자과를 전공한 이유로, Radar (비행기의 이착륙을 지시하는 관제사가 둥근 화면에 찍히는 하얀 점 (비행기)를 보면서 비행기 조종사과 교실할 수 있도록 하는 큰 시스템) 정비 하사관(엔지니어)로 일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는 누구보다도 시스템의 문제의 원인을 잘 찾아내서 고쳐내는 엔지니어의 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고참들도 그런 저를 예뻐해 주셨고, 저는 그 실력 덕분에, 그리고 또 한가지, 당시 저희 하사관 내무반 15여명은 틈만 나면 공터에 의자로 골대를 만들어서 병들과 2만원 내기 축구시합을 했는데, 하사관이 늘 져서 강원도 출신의 다혈질 하사관 내무반장님이 늘 화가 나 있던 때 였는데, 제가 그 내무반에 배치된 첫날부터 4대 1로 격파. 너무도 놀란 내무반장님은 입대 첫날부터 저를 근처 육군 PX (군매점)에 데리고 가서, 저녁에 소주를 사주시는 특별 대우를 해 주셨습니다. 그후 병들과의 축구시합, 족구시합등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고, 내무반에서 '마라도나'라는 별명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고참들의 눈치보는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저는 거기 군대에서도 밤 10시 취침시간이 되면 일어나서 옆방 시스템실에 가서 12시까지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매일밤 이렇게 하다보니 고참들도 인정하게 되었고, 묵인해 주었습니다. 때로 짖굿은 고참이 "윤태야, 30분만 얘기하자", 라고 해도, 저는 뿌리치고 공부하러 갈 만큼 영어공부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군대는 나한테 '천국'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생활했습니다.
무료로 잠자리와 밥을 주고, 엔지니어로서의 실력을 키워주고, 하사관이라서 매달 월급이 나왔고, 내가 하고 싶은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이곳, 지금 여기가 나에게는 '천국이다!', 제대후 사회에 나가면 이런 환경은 두번 다시 없을 것이다, 라고 느끼면서 생활했습니다.

보통 비행장은 비행기의 이착륙에 필요한 긴 활주로가 있어서 비행장의 규모가 아주 큰 데, 수원비행장도 아주 커서 비행장의 정문쪽에서 활주로 반대쪽의 시설로 가려면 먼 외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하는데, 당시 비행장의 미군들도 많아 그들 전용의 셔틀버스가 외곽을 정기적으로 다녔고, 한국 군인들은 못 타게 되어 있었지만, 그 셔틀버스의 운전사분들은 한국분들 이셨습니다. 저는, 영어 말하기 연습을 위해서 저 셔틀버스에 타서 미군들에게 말을 걸면 되겠구나 생각을 해서, 한국분 운전사분들게 몇일이고 태워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안 된다고 허락을 안 하셨습니다만, 저는 끈질기에 부탁을 드렸고, 한 아저씨가, "그럼, 타서 별다른 말썽 피우지 마시고, 영어 말하기 연습하고, 다시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서 내리세요"라고 하시면서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라디오에서 매일 아침 6시에 하는 곽영일의 생활영어, 한달치 표현을 종이에 적어서, 전날 야간근무를 하고, 아침 9시에 내무반에 내려오면 내무반에서 자지 않고, 그 셔틀버스에 타서 옆자리의 미군들에게 말을 걸면서 말하기 연습을 했습니다. 한 2시간 셔틀버스가 기지내 외곽을 왔다갔다하는 동안 연습을 하고 내려서 오후에 잠을 자곤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군대에서도 영어공부를 꾸준히 했습니다.

야간근무를 해도 아침에는 같이 야간근무한 병 (병장, 상병) 2명과 함게 곽영일의 아침 생활영어를 꼭 같이 들었고, 당시 병 (병장, 상병)에게도 영어공부를 하도록 권하곤 했습니다. 그때, 병장이었던 최병장은 저의 권유로 영어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일단은, 매일 영어단어 3개와 그 단어의 예문 1개씩 적어서 외우는 것으로 시작해서 3개월후는 시중에서 기초생활영어책을 사서 한 권을 다 공부하는 식으로 했고, 제대후 금오공대 3학년으로 복학 한 최병장은 1년후에 제게 편지를 보내서 대학내 영어 스피치 경시대회에서 2등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하사관으로 군생활을 시작한지 약 2년반만에 저는 중사로 진급하면서, 영외거주를 할 자격을 얻어, 수원 시내 정자동에 월세방 하나를 얻어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고, 저희 Radar 정비실은 24시간 근무하기 때문에, 제가 야간근무를 하는 날이면, 다음날 아침 9시에 퇴근해서 그날 오후는 쉴 수 있는 그런 시간이어서, 저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명동성당 근처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영어회화 공부를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영어 Pop Song 이 아주 유행하고 있어서, 길거리의 커피숍이나, 라디오등에서 Michael Jason, Celine Dion, Air supply, Abba 등의 노래가 많이 흘러나왔고, 저는 마음에 드는 팝송을 알게 되면, 종로서적에 가서 Pong Song 가사책에서 그 노래 가사를 찾아서 노트에 적고, 그 팝송을 카세트에 녹음해서 반복해서 들으면서 그 팝송 가사의 영어 표현들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길을 걸어가면서도, 전철안에서도 카세트의 팝송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그 가사의 뜻을 파악하고자 노력했었습니다. 당시 가장 감동적으로 외운 팝송이 Celine Dion 이 부른 The Power of love 였고, 이 곡은 지금도 가끔 듣곤 합니다.
그때 팝송 가사를 적은 노트가 여러권 됐을 정도였죠.

팝송가사로 영어공부를 하다 보면, '와, 이렇게 쉬운 영어단어로, 첫사랑의 설레임, 이별의 아픔등 심오한 감정들을 다 표현할 수 있구나'라는 놀라움이었죠. 그래서, '쉬운 영어단어로 유창한 영어' 의 한가지 방법임을 그때 알게 되었죠. 

저는 금오공고를 졸업후에 바로 하사관으로 군대를 갔기 때문에, 언젠가는 대학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고, 군대 의무복무 5년을 마치면 바로 대학에 갈 계획이었는데, 당시 저희 Radar 기술부서에는 저 이후로 후배 하사관이 배정되지 않아, 제가 제대하면 당장 기술 후임자가 없게 되는 상황이어서, 당시 저희부서에서는 저에게 야간대학을 가면 다닐 수 있도록 근무 시간을 조정해 줄테니 1년 더 연장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고, 저는 대학시험을 봐서 서울 공릉동에 있는 '서울산업대학' 야간에 합격했고, 24시간 군무가 필요한 저희 Radar 기술부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다음날에는 퇴근해서 서울산업대학에 가서 수업을 듣는 식으로 1년간 군 근무와 야간대학을 병행해서 다녔고, 군대생활 6년을 마치고, 제대해서,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한국통신 기술직 6급 시험을 봐서 합격해서 그 다음해 광화문에 있는 한국통신 국제전화국에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대후에는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한국통신에서 일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군대생활 6년간 하사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월급이 있었고, 군대에서는 제 월급중에 10만원은 매달 적금을 들어주었고, 그 매달의 10만원이 제대때에는 2000만원이 되어, 저는 제대하면서 그 2000만원 통장을 부모님께 그대로 드리면서 반지하 월세에서 1층 빌라로 옮기시도록 했습니다.

제대후, 2000만원 통장을 부모님께 드리고, 매달의 월급이 끊긴 상태에서 저는 한국통신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새벽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세차하는등의 아르바이트을 하면서 학비와 용돈을 충당하게 되었습니다.

3) 한국통신 3년간

 - 600억원의 프로젝트에서 인수시험 최종 실패판정 일보직전에 구해낸 이야기
 - Mr Kim, You look like Johnny Five.

당시 90년대초의 한국통신은 민간기업이 아니고 한국에서 유일한 전화사업 독점 공기업으로 안정된 회사이면서 경쟁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제가 들어갔을 때는, 제 선배님들은 50대의 (남성, 여성)분들이 많았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저 밖에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는 제2의 통신사업자로 '테이컴'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통신사업, 특히, 국제전화, 국제팩스 사업에서는 드디어 경쟁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고, 한국통신도 국제팩스 사업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위해서 미국 회사로부터 큰 (당시 우리돈으로 60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새로운 기술의 통신 시스템을 미국의 Atlas Telecom (당시 미국 시애틀 아래의 Oregon 주 Portland 시에 있던 통신 기기 메이커)이라는 회사에서 구입하기로 했고, 이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한국통신에서 5명의 엔지니어가 가서 3개월 기술교육을 받게 되는데, 저도 망내로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선배들은 영어가 안 되고, 또, 굳이 기술배워야 하나의 기분으로 간 거라서 수업시간에는 내내 졸다가, 저녁 밤에는 쌩쌩해지는 등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낮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미국인 교관에게 매번 자주 질문을 하는 건 저였고, 약 한 달지나서 어느날 수업시간에 미국인 교관이 저보고, "Mr Kim, you look like Johnny Five" 라고 말했고, 저는 "Who is Johnny Five?  What is Johnny Five?"라고 질문을 했고, 그 교관은 "Anyhow, you are Johnny Five" 라고 했습니다. 

3개월 교육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큰 시스템을 설치하기 위해서 그 회사의 미국인 엔지니어 2명이 와서 광화문 한국통신 건물 5층에 시스템을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와 같이 입사한 동기는 20명 있었는데, 매일 아침 출근하면 대리님이나 과장님이 뭔가 일을 시킬때까지 앉아 기다리기 일 수 였지만, 저는 이 미국인들은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서 이 두명의 미국인들 옆에 가서 그들이 뭘 하는지 다 적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같이 데리로 나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 또 그들 옆에서 뭘 하는지 다 적고, 토요일, 일요일에도 그들이 나와서 일하면 저도 나와서 같이 일했습니다.
이렇게 매일 그들이 하는 걸 다 적다보니, 한 3개월후에는 이 새로운 시스템을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은 제가 되었고, 통신 엔지니어로서 알아야 할 Linux, SQL 등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었고, 이 시스템의 기능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시스템 설치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 갈 무렵 한국통신 마포전산국 담당자가 와서 이 새 서비스를 시작해서 한국의 사람들이 국제팩스 서비스로 사용하면 그 사용료를 매달 청구하기 위한 Billing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이 새 시스템에서 이러한 자료를 매달 빼달라는 의뢰가 있게 되었고, 미국 엔지니어는 미국 본사에 연락해서 요구상황을 파악해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데 약 3주정도 걸릴거라고 했고, 마포전산국 담당자는 안 된다고, 3일후 월요일까지 자료가 필요하다고 부탁 부탁을 했지만, 그 미국 엔지니어들은 그렇게는 안 된다고, 3주정도 걸린다고 하면서 회의가 끝났습니다. 그 상황을 본 저는, 다음날 토요일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SQL 책을 사서 SQL 명령어를 다 공부해서 마포 전산국에서 필요로 하는 데이터를 국가별/월별/주별/일별로 뽑아내는 SQL 스크립트를 만들었고, 다음날 일요일에는 SQL 에서 뽑아낸 자료를 마포전산국에서 필요한 포맷으로 다시 변환하는데 필요한 Unix 컴맨드를 찾아내서 프로그램을 완성해서 월요일 마포전산국에 보내게 됩니다. 그걸 본 미국인 엔지니어 둘은 크게 놀라면서, 역시 너는 Johnny Five 라고 했죠.

이렇게 3개월 좀 넘게 설치가 완료된 시스템은 이제 한국통신에서 요구한 70여개가 넘은 기능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때 저는 개인적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고, 휴가후 월요일 사무실에 출근하니 모두가 울상이었습니다. 왜, 다들 울상이냐고 물어보니, 기능시험중에 한가지 기능이 좀처럼 제대로 동작하지 않고, 몇번을 해도 실패한다는 것이었고, 경쟁회사 데이컴이 비슷한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가 빨리 해결이 안되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이었고, 화가 난 한국통신 담당자는 내일 화요일 아침 10시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이 프로젝트 접을 것이라는 최후의 통첩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명의 미국인 엔지니어는 저녁 5시에 더 이상 조사를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갔고, 저는 혼자서 이상하다, 왜 안되지? 하면서 밤새 혼자서 연구/궁리를 하면서 동작 시험을 했고, 내가 아는 이 기능의 동작 원리는 이것이니까,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 보자, 반복해서 시도하면서 마침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게 됩니다. 다음날 화요일 (최후 통첩의 날 아침)에 출근한 미국인에게 설명을 했고, 처음에는 안 믿다가 제가 이렇게 하면 잘 됨을 여러번 시연하자 기절하듯이 놀라면서, 미국 본사의 사장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고, "Johnny Five made it (Johnny Five 가 해냈어요)" 라고 보고 했고, 본사의 사장은 "Let's make  real Johnny Five's movie again ( Short circuit 이라는 미국 영화에서 활약하는 로보트 Johnny Five 가 아니라, 인간 Johnny Five의 영화를 다시 만들자 라는 농담) 라고 하면서 놀라했습니다,
당시 직원 200명 정도의 이 회사에서 60M$ (우리 돈으로 약 600억원)의 프로젝트는 정말 엄청나게 큰 프로젝트로, 마지막 순간에 구해 낸 저는 그 회사에서 아주 유명해 졌고, 시스템 인수시험 완료 판정 회의에서, 한국통신 담당 과장님께서, 이 미국회사 영업담당자에게 반 농담으로 한 말이, "이 프로젝트를 마지막 순간에 Mr Kim이 구해 냈으니, 당신들 Mr Kim에게 10억원이상은 로열티로 줘야하는 거 아냐?" 였습니다.

제가 그후 약 3년간의 한국통신을 그만두고 LG 전자로 옮기자 마자, 미국의 Atlas Telecom사는 저에게 전화를 해서 LG전자로 가지 말고 자기네 회사로 오라면서, 얼마를 원하는가 "How much do you want?" 의 제안을 거듭 하게 됩니다.

4) 미국 Atlas Telecom 회사에서 3년간

제가 나중에 Atlas Telecom 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 당시 저의 한국통신 연봉은 약 980만원 이었고, LG전자에서의 연봉은 약 1100만원 정도였지만, Atlas Telecom 으로 옮기면서는 연봉 4500만원으로 계약을 하고 옯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때부터 영어공부만은 꾸준히 한 덕분에, 저는 미국회사로 옮길 수 있었고, 연봉이 1100에서 4500으로 껑충 뛸 수 있었던 것이죠.

당시 저의 월급은 매달 제 한국 통장으로 달러 ($)로 입금이 되었는데, 계약당시에는 1$ = 800원으로 환율 이었는데, 한국에 IMF가 터지면서 환율이 900, 1100, 1200 으로 오르더니, 한 때 1600원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고, 저는 급여가 두배로 뛰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Atlas Telecom 에서 저의 역할은 International Field Engineer 로 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의 프로젝트를 커버하는 엔지니어) 담당이었고, 그래서, 중국 프로젝트에 3번, 그리고 여러번 일본에 와서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고, 약 1년정도 제가 일본에서 와서 일하는 것을 지켜본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국회사에서 저에게 일본으로 와 줄 수 있냐는 스카우트 제안을 하게 되었고, 역시 "How much do you want? (얼마를 원하십니까?) 였고, 저는 당시 약 700만엔 (우리돈으로 약 7000만원)의 연봉으로 일본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에 있는 미국회사였기 때문에 인터뷰도 영어로 했고, 일본어는 전혀 몰라도 괜찮다는 조건이었고, 일본에 와서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서 학원등에 가면 학원비를 다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또 한번, 고등학교때부터 영어하나만은 열심히 한 덕분에, 일본어를 하나도 몰라도 일본에까지도 올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스스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제가 일본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일본 법무성으로부터 취업비자를 발급 받아야 하는데, 그럴려면, 저의 대학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 제출이 필요했고, 다행히 저는 늦게라도 서울산업대학을 졸업했기에 이런 필요 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고 무사히 취업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5) 일본에 있는 미국계 통신회사에서

 a. 2년간 매일 새벽 5시반부터 3시간 맥도날드에서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한 이야기

당시 일본의 이 미국 통신회사는 본사가 미국 텍사스 달라스에 있는 회사로, 당시 통신의 지능망 (Intelligence Network) 솔루션으로 나름 큰 회사였고, 일본에서는, Docomo 에 이어서 두번째로 큰 일본 휴대폰 통신 사업자 KDDI에 아주 많은 시스템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어서, 일본 지사의 기술부 사무실의 절반 이상이 미국인 엔지니어들이었고, 제 윗사람도 미국인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일본어는 몰라도 일하는 데 불편하지 않은 그런 근무 환경이었죠.
당시 저는 일본 전국 13개 주요도시에 전개된 63개의 시스템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매일 문제 대응 (원인분석해서 해결하는 것) 에 바빴고, 매일 밤 12시, 1시에 퇴근하기 일 수 였습니다. 그렇게 한 6개월이 지난뒤에 저는, 아무리 일본어가 필요없는 근무 환경이라고 해도, 일본 고객과의 원만한 소통을 위해서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당시 저희 사무실이 타마시라는, 신주쿠에서 전철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있었고, 또, 매일 매일 밤 늦게 퇴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내의 일본어 학원에 가서 공부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기에, 제가 정한 방법은, 아무리 밤 늦게 퇴근하더라도, 집에서 가까운 맥도날드가 새벽 5시반에 문을 여는데, 제가 매일 첫손님이 된다는 것, 200엔 모닝 셋트를 먹으면서 8시 30분까지 3시간 공부하고 출근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5시반 맥도날드의 첫손님이 되기 위해서 저는 5시 25분까지 문 앞에 가서, 5시 30분에 문을 염과 동시에 들어가는 걸 매일 매일 해서 2년간 지켰습니다. 전날 밤 11, 12시에 퇴근을 해서 잠을 3, 4시간밖에 못 자더라도 이 원칙은 꼭 지켰고, 모자라는 잠은 일요일 오후에 자는 식으로 했습니다. 
당시 오사카, 히로시마, 나고야, 센다이등 일본 국내 출장도 많았고, 저는 호텔에서 아침을 먹어도 되었지만, 전날 꼭 호텔 주변의 맥도날드를 미리 찾아두고, 다음날 새벽에는 그 맥도날드에 가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9시에 호텔로 돌아와서 동료들과 일하러 가곤 했습니다.

당시 제가 정말 2년간 변함없이 매일 새벽 첫 손님으로 들어와서 3시간 꼬박 앉아서 공부를 하다보니, 저희 집 근처의 그 맥도날드 직원들 (아르바이트 학생들) 사이에서 저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고, 어느 날은 한 직원이 와서, "저, 어느 대학 교수님이십니까" 라고 물어보기까지 했었고, 또, 맥도날드의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그만둘때는 꼭 전날 저한테 와서, "선생님, 저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고 그만두곤 했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꼭 아침에 3시간 일본어를 공부하고 오후에 다른 일과를 보는 식으로 일본어를 독학으로 꼬박 2년간 공부하고 나니, 기본 회화를 어느정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날 일본 고객과의 회의에서 제가 일본어로 회의하는 것을 본 저의 부서의 메니저 Lawrence 가 놀라서, 회의후에 저보고 "너, 오늘 회의에서 일본어로 하더라" 했고, 저는 농담으로 "really?" 로 받아치면서 마음속으로는 "드디어 해냈다"고 외치고 있었죠.

그 다음은, 일본어로 정중하게 이메일 쓰기를 공부했습니다. 특히, 고객에게 쓰는 일본어 이메일에는 일본어 특유의 존경어, 겸손어 표현이 많아서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제가 한 방법은, 제가 먼저 일본어로 고객에게 보낼 이메일을 쓰고, 그걸 고객에게 보내기 전에 제 팀원 고바야시 (쿄도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상이 보고 수정해 주면, 일단 그걸 고객에게 보내고, 저는 그걸 인쇄해서 반복해서 써보고 외우는 식으로 반년정도 이렇게 해서 이메일도 일본어로 어느정도 정중하게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렇게 인쇄해서 외웠던 일본어 이메일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저희 일본 지사의 KDDI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고, 저희 부서의 미국 엔지니어들은 다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저희 팀의 팀장도 돌아가면서 우리팀의 팀장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제가 팀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팀장이 되다보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팀장인 제가 책임지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고객과의 이메일 서신, 회의등을 직접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다행히 저는 그때쯤에는 이미 일본어회화와 이메일 실력을 어느 정도 갖춘 상태였기 때문에, 제 팀원 일본인에게 대신 써 달라, 말해 달라는 식의 부탁을 하지 않고도 혼자서 능히 처리할 수 있는 떳떳한 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2년간 매일 새벽 맥도날드에서 3시간 독학으로 공부해서 일본어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일본어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후 제가 일본에서 20년이상 꾸준히 일할 수 있게 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영어/일본어를 다 할 수 있다보니, KDDI 프로젝트 뿐만 아니라, 그후 다른 일본의 통신 사업자 Softbank, Docomo 등의 일본 고객의 여러 프로젝트에도 저는 참가할 수 있기에, 제 윗사람은 일본 고객을 상대로 하는 다른 큰 프로젝트등도 제게는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죠.

 b. 일본 고객과 미국 개발팀간의 전화회의에서 일본어 - 영어 통역을 해야 했던 상황

또 한가지, 여기 일본에서 일하면서 저의 영어 듣기 실력이 향상될 수 밖에 없는 프로젝트도 있었습니다.

당시 여기 일본의 PHS 휴대폰 사업을 하고 있던 Wilcom 이라는 통신사업자가 있었고, 매년 휴대폰에 새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서 소프트웨어 개발로 약 3억엔 (우리돈으로 약 30억원)정도의 프로젝트가 있었고, 우리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개발팀이 약 5, 6개월 걸려서 새 소프트웨어를 개발 시험해서 일본으로 보내면, 고객은 고객의 랩 (Lab)에서 다시 다 필요한 기능시험을 했는데, 그러면서 발견되는 문제들은 엑셀로 하나하나 정리해서 미국개발팀에 보고하고 미국 개발팀은 그 보고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련의 과정이 2,3달 진행되게 되는 데, 이 때는, 매주 화요일 아침에 고객의 일본인 엔니지어 2,3명이 저희 사무실 회의실로 와서, 미국팀과 전화회의를 하면서, 보고한 문제의 조사 현황을 묻고, 미국 개발팀이 전화상으로 설명하는 회의가 매주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고객이 일본어로 저에게 문제의 내용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하면, 저는 그걸 영어로 번역해서 미국 개발팀에 설명하고, 담당 개발 엔지니어가 텍사스 엑센트로 빠르게 설명을 하면 저는 그의 설명을 기술적으로 그리고 영어로 이해하기 위해서 최대한 집중해서 듣고, 가능한 한 다시 한번 설명해 달라는 부탁없이 그의 기술적인 설명을 이해해서, 다시 고객에게 일본어로 설명해 주는 그런 회의를 여러 해 하면서, 제 듣기 실력이 늘기도 했습니다. 혹시, 제가 바빠서 제 팀원인 사또상에게 대신 이 역할을 맡기면, 사또상은 미국 개발팀의 빠른 영어 설명에 대해서, pardon? Would you explain again? 이 반복되면서 회의가 길어지는 상황이 되기도 했죠.

이런 기술적인 회의에서는 영어실력만으로는 그 역할을 할 수 없고, 그 문제의 기술적인 내용도 미리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그 미국 개발자의 빠르고 구체적인 기술적인 설명을 바로바로 이해할 수 없죠. 그래서, 저는 매주 회의에 앞서서, 각 문제의 기술적인 내용도 미리 파악하고 그 회의에서 통역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해서 임했죠. 

c. 특별승진 한 이야기

특별승진 (1)

저는 일본에 와서 시스템상의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남다른 탁월함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 팀의 어려운 문제들도 제가 가서 해결해 주는 경우도 많았고, 특히, 당시 KDDI 와의 프로젝트가 많은 상황에서 KDDI 와의 비지니스를 담당하고 있던 미국 영업부장 Lieni Hammar 는 프로젝트중에 생겨서 좀처럼 해결이 안되고 있는 문제는 꼭 저에게 특별히 따로 부탁해서 좀 해별해 달라고, 마지막 인수시험에서 이 한 문제가 해결 안되서 1M$ (우리 돈으로 약 10억) 을 고객으로부터 못 받고 있다고. 그러면, 저는 거의 95% 이상 1,2주내에 해결하고, 'Mission completed' 로 답을 했고, 그는 일본에 출장 올 때마다, 저를 데리고 도쿄 르뽕기의 고급 식당에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고 했죠.
그래서 저는 미국 본사에서도 나름 꽤나 유명한 엔지니어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휴대폰 사업자중에서 가입자가 가장 많은 게 Docomo, 그 다음이 KDDI 였는데, KDDI가 중고생들을 타켓으로 한 휴대폰 서비스가 큰 인기를 끌면서 도쿄의 가입자가 급격히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휴대폰 가입자가 어디 가입자인지 (도쿄 가입자인지, 오사카 가입자인지, 다른 나라에서 방문 온 로밍 가입자인지등을 확인하고 처리하는 저희 회사 제품 (HLR)를 당시 300만가입자까지 처리가능한 시스템을 600만 가입자까지 처리 가능한 시스템으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왔고, 저희 미국 개발팀은 그 시스템을 만들어서 KDDI 에 설치하게 됩니다. 아주 덩치가 큰 시스템을 3개월정도 걸려서 미국 엔지니어 두명이 설치하였고, 드디어 기능시험에 들어갔려는데, 전원을 키자마자 초기부터 시스템에서 이상한 에러 (error) 메시지가 끊없이 계속 나오게 됩니다. 여러 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시스템을 여러번 설치하고 인수시험을 한 경험이 많은 그 두 미국 엔지니어조차도 이런 내용의 에러는 처음이었고, 바로 미국 본사 개발팀에 연락을 해서 조사에 착수하게 됩니다. 미국 개발팀에서도 쉽게 원인을 찾지 못하고 1주, 2주 시간이 가면서, 휴대폰 가입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기에 이 시스템을 예정대로 개통을 못하면 정말 큰 일이 나는 KDDI 는 당황하게 되고, 미국 개발팀한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빨리 해결하라는 다급한 부탁을 하게 되고, 미국 개발팀의 엔지니어 두 명이 특별히 일본에 와서 직접 조사를 하게 됩니다만, 그 개발 엔지니어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면서 상황은 정말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고객 KDDI 는 아침 9시에 미국 개발팀과 조사 상황보고 회의, 저녁 5시에 두번째 상황보고 회의를 하면서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고, 미국 본사에서는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반이 꾸려져서 조사에 임하지만, 1달이 넘도록 원인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저는 다른 Soft bank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어서 그 KDDI HLR 프로젝트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았는데, 어느날 미국팀에서 저희 일본지사 기술부 부서장 오히라상에게 전화를 해서, Johnny Five를 이 문제 조사에 투입해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었고, 오히라상은 Mr Kim (Johnny Five) 은 그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지 않고, 그는 그 시스템을 모른다고 하면서 거절했지만, 미국팀은 그래도 괜찮으니 제발 Johnny Five 를 투입시켜 달라고 했고, 오히라상이 저를 불러서 상황을 설명하고 현장에 가서 도와주라는 지시를 하게 됩니다.
저는 바로 도쿄에서 북쪽으로 한 참 떨어져 있는 Urawa 라는 곳에 있는 KDDI 현장에 가서 상황 설명을 듣고 제 나름의 조사를 시작했습니다만, 정말 쉽게 원인이 찾아지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것 저것 조사해 보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집에도 안가고 시스템실에서 앉아서 몇시간 자고 문제 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뭔가 해볼려고 하면 당시 그 HLR 프로젝트의 팀장이었던 나가타상이 "그건 너무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그러다가 시스템 망가지면 우리 책임이라고, 미국팀에서 이 문제의 조사를 책임지고 있으니 부탁받은 것만 하라고" 하면서 툭하면 저의 조사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니, 이런 상황에서 니 책임, 내 책임 따질 때냐고" 하면서 고집스럽게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KDDI 고객이 최후 통첩을 하게 됩니다."이 문제 발생이후 1달반이 경과했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일부터 5일간 황금연휴이니, 이 5일간 이 문제가 해결안 되면 이 프로젝트 접기로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팀은 더 이상 조사할 아이디어가 없는 상황이었고, 저는 저대로 나가타상이 툭하면 저의 조사방법이 위험하다고 가로막는 상황에서 3일이 지나고, 2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날 아침에 제가 나가타상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미국팀에 전화를 하게 됩니다.
"John, 이제 이틀밖에 안 남았어. 말해, 너희팀 뭔가 조사할 내용 있어? 말해, 내가 다 조사해 줄께, 있어 없어?" John 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럼, 지금부터, 이 문제의 조사에 있어서 미국팀도 일본팀도 다 내 지시에 따라. 이제부터 이 문제의 조사는 모두 전적으로 Johnny Five 의 지시에 따른다는 이메일을 관계자 모두에게 지금 보내", John 이 그러죠, "무슨 말이야, 여기 부사장님께 보고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해", 제가 그랬죠. "지금 이 급한 상황에서 문제를 조사하는 너와 내가 결정하면 되지, 뭐가 필요해. 시간없어, 지금 빨리 보고하고 허락받아서 모두에게 이메일 보내. 그래야, 내가 하고 싶은대로 조사할 수 있으니까". 약 30분후에 사내 이메일 발송되고 이제, 나가타상도 더이상 저를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제가 미국팀에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 조사방법을 고객에게 설명할테니 저녁 7시에 KDDI 와 전화회의를 셋팅해" 라고, 저녁 7시에 전화회의가 시작되었고, 미국팀이 Johnny Five 가 문제 조사 계획을 발표할 거라고 하고, 제가 KDDI 고객에게 일본어로 얘기합니다, "와타나베상, 저기 시나가와에 있는 귀사의 lab에 있는 Software version 이 좀 한 단계 이전 버전인 HLR 시스템의 back plane (mother board)를 떼어내서 이 새 시스템과 교체해 보겠습니다."그러자 KDDI Watanabe상이 놀라면서, "아니 그 위험한 작업을 한다고요? 해 본적 있으세요?" 제가 그러죠 "아니 없습니다" "김상, 아니 해 본적도 없는 그 위험한 방법을 해 보겠다니, 제 정신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혹시 잘못되면 그 Lab 의 HLR 시스템도 망가진다는 건데,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와타나베상, Lab 의 HLR 시스템 망가뜨리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와타나베상,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감히 함부로 이 위험한 방법을 제안드리겠습니까, 저도 많은 고민과 제 경험을 총 동원해서 조심스럽게 제안 드리는 것이고, 저 정말 제 정신으로 드리는 제안입니다. 남은 이틀간 저희 미국팀은 더 이상 조사할 아이디어가 없어서 실질적인 조사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대로 가면 내일 마지막 하루 그냥 지나갑니다. 저를 믿고 기회를 주십시요. 부탁드립니다." KDDI 는 한 30분 내부회의 끝에, "김상, 알겠습니다, 한 번 해 보세요. 저희가 뭘 도와드릴까요?" " 지금부터 택시를 타고 시나가와의 귀사 Lab 에 갈테니 문만 열어주시면 됩니다". 바로 택시타고 랩에 도착한 시간이 밤 11시. 그때부터 100여개가 넘은 케이블을 mother board 에서 하나하나 떼어내어 나중에 다시 붙일 수 있도록 라벨을 하나하나 붙이는 작업이 완료된 게 다음날 아침 5시. 이 mother board 를 가지고 Urawa 시스템실로 차타고 와서, 옆에 두고, 새 시스템에서 똑같은 mother board 를 떼어내는데 다시 5시간, 그리고 새 시스템에 랩에서 떼어 온 mother board 를 붙이고 나니 저녁 5시. 이제 전원을 킬 준비가 되었고, 제 뒤에는 제발 문제가 해결되기를 비는 우리 회사 영업사원들과 고객 관계자들 20여명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전원을 키자, 똑같은 error 가 나오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큰 실망의 한숨을 내 쉴 때, 제가, "여러분, 다 나가 주세요. 저 혼자 있게 해 주세요.", 30분후에 모두 들어오게 해서 제가 시스템의 전원을 켜자, 문제가 깨끗이 해결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 error 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환호하면서, 저에게 물어봤죠. 어떻게 된 거냐고. 아니, 그 30분 사이에 뭘 한거냐고?
"제가 원래 생각했던 그 mother board 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었고, 그 mother board 전면에 붙여서 동작하는 4장의 Matrix 보드를 시나가와 랩에서 가져왔고, 그걸 교체했더니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 4장은 좀 오래된 것으로 board 의 firmware version 이 좀 이전 버전으로, 이 이전 버전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김상, 어제 밤에 문제 조사방법 설명에서는 그 4장의 보드를 헌 것과 교체해본다는 얘기는 없이 않았습니까?" "예, 왜냐하면, 그 4장의 보드는 그동안 조사 과정에서 수도 없이 교체해 봤기 때문에, 제가 또 교체해 보겠다고 하면, 모두가 안 믿어 줄 것 같아서 말하지 않고, 렙에서 오늘 아침 몰래 가져왔고, 이 4장의 보드는 firmware 버전이 좀 헌거라서 혹시 뭔가 차이가 있지 않을까해서 교체해 봤는데, 역시 이 4장중에 한장이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래서,미국팀의 추가 조사가 있었고, 멕시코 공장에서 어느 일정 기간중에 생산된 보드중에 약간의 설계미스, 규격보다 좀 큰 Capacitor를 사용해서, 신호전달에 있어서 약간의 지연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는 보드가 있다는 것이 파악되었고, 불행하게도 그 문제의 보드가 KDDI 프로젝트에 여러장 오게 된 것이고, 조사 과정에서 여러번 교체해 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임이 밝혀져, 이들 문제의 보드를 폐기하고 새 보드로 교체하면서 인수시험이 무사히 완료되고 시스템을 개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최후통첩의 마지막날 저녁에 제가 극적으로 이 큰 프로젝트를 구해 내게 된 것이고, 회사는 저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아시아 태평양 본사 (상하이)로부터 표창장이 수여되었고, 일본 지사의 사장, 인사부장, 저, 제 보스 4명이 인사부에 모여서 저의 특별승진과 급여인상을 결정하게 됩니다. 특별승진은 이렇게 정말 아무도 모르게, 사장님, 인사부장님, 저, 제 윗사람 넷이서 졀정하는 것이었고, 제 연봉은 껑충 뛰게 되었죠. 그도 그럴 것이, 이 KDDI 라는 대 고객의 이 프로젝트가 혹시라도 실패했다면, 저희 회사는 두번 다시 KDDI 에 제품을 납품할 수 없는 black list 에 오르게 되고 그건 우리 회사의 일본 비즈니스에 있어서, 너무나도 큰 타격이 될 것인데, 이걸 마지막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해결했으니, 정말 특별승진으로 제 연봉을 많이 올려줘도 아깝지 않은 상황이었죠.

특별승진 (2)

그후 몇년간 이 KDDI 는 가입자가 꾸준히 늘면서 전성기를 보내는 중에, 위의 HLR 시스템을 HW, SW 모든 면에서 최신 기술로 새롭게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그때까지의 HLR 시스템은 정말 트럭 몇대분이 될 만큼이나 덩치가 큰 규모의 HW 중심의 설계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시스템실의 공간을 엄청 차지하고 있어서, 이걸 당시의 최신의 서버와 SW 로 만들면 크기가 트럭크기에서 승용차크기가 될 만큼 작고 깔끔하게 만들 수 가 있었죠.
미국 개발팀은 그런 새로운 디자인의 HLR을 1년 넘게 개발했고, 드디어 일본으로 보내서 설치가 시작되는, 즉 일본에서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단계가 되었는데, 저희 일본 기술부의 KDDI HLR 담당 팀장인 하세가와상이 프로젝트 시작 1달을 앞두고 갑자기 그만두게 됩니다.  이 큰 프로젝트를 일본쯕에서 리드하기 위해서는 이 HLR 에 경험이 많은 하세가와상이 팀장으로서 필요했는데, 갑자기 그만두니, 우리 기술부의 부서장인 나가타상은 크게 당황을 하고 있었죠. 그렇다고 어디서 이 HLR에 경험이 있는 팀장급을 갑자기 구할 수도 없고. 나가타상의 그런 고민이 지속되면서, 직접 이 KDDI HLR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지 않고 있던 제가 나가타상 사무실로 가서, "나가타상, 당신이 우리 부서의 부서장인데,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제가 할께요. 오로지, 제 윗사람인 당신을 위해서 제가 할께요." 그러자 나가타상이 "J5, 너 니 프로젝트도 바쁜데, 어떻게 이 큰 프로젝트를 하겠다는 거야?" "나가타상, 뭔가 대안 있어요? 이제, 3주후면 고객과 프로젝트 Kick-Off 해야 하는데, 뭔가 대안 있어요? 없잖아요. 그러니, 제가 할께요" "그럼, 정말 부탁해도 될까?".
저는 바로 5명의 엔지니어로 팀을 구성해서, 그 새로운 HLR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5명을 데리고 미국 텍사스 달라스 개발팀에 가서 1주일간 여러가지 설명을 듣고 노트에 적어가며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프로젝트를 리드하게 됩니다. Minami-san, 너는 미국 엔지니어들과 함께 설치 (Installation)을 담당해. Uedahara-san 과 Hisu-san, 너희 둘은 이 새로운 HLR 의 알람 설계를 담당해. Sato-san 하고 나는 고객 램 (Lab)에서의 소프트웨어 테스트를 담당한다. 매일 각 담당자들에게서 어떤 문제가 발견됐는지 상황보고를 받고, 제가 맡은 고객과의 소프트웨어 기능시험중에 나온 문제들을 제가 다 정리해서 매일 밤 미국 개발팀에 일본시간으로 10시, 11시에 보내고,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미국팀과 밤늦게 전화회의로 설명하고 마치면, 밤 12시반, 거의 매일 막차 (전철)로 겨우겨우 집에 가는 날이 몇달이고 계속되었습니다. 프로젝트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서 주말에도 나와서 고객과 소프트웨어 기능 시험을 해야 했고, HW 도 SW도 다 완전히 새로 설계된 것들이다보니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으로는 한계가 있고, 새로운 여러 프로그램에서 문제 투성이었죠.

그렇게 몇달간의 고생끝에 도쿄 랩 시스템의 구축과 기능시험이 끝나고, 드디어 오사카의 두 곳에 이 시스템을 설치하고 시험하는 작업이 시작.
저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 도쿄에서 신간센으로 오사카에 가서 호텔에 체크인. 월요일부터 금요일 매일 밤 늦게까지 문제의 조사, 고객에게 오후 5시에 그날 진척상황보고, 고객이 왜 이 문제해결에 이토록 시간이 많이 걸리냐고 핀잔을 받으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곧 해결될 거라고 말하면서 대응. 밤 늦게 그날의 진척상황과 새로 발견된 문제들, 그리고 고객의 질문등을 정리해서 미국팀에 이메일 보고. 늦게 몇시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미국팀으로부터 답이 왔는지 확인, 아직 안 왔으면 다급하게 미국팀에 전화해서 확인 과 재촉, 그래도 시원한 답이 없으면, 아침에 고객에게의 현황보고에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다음날 꼭 챙기겠다고 약속.
이런 프로젝트에서, 미국팀과의 연락, 고객과의 연락/상황보고등은 모두 팀장의 역할이기 때문에, 저는 매일 매일 정말 엄청 바빴죠.

오사카에서 도쿄로 오는 신간센은 토요일 새벽 5시가 첫차. 저는 이 첫차로 올라와서 당시 매주 토요일 제가 사는 지역의 공민관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던 때여서, 서둘러 아침 10시까지 도쿄로 와서 토요일 한국어 교실에서 2시간 한국어를 가르쳤죠.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좀 쉬고, 다음날 일요일 오후에 다시 신간센으로 오사카로 내려가서 한주 바쁜 프로젝트 리드. 

당시 프로젝트를 리드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큰 애로사항은, 일본과 미국간의 시차가 13시간 있다보니, 매일 저녁에 제가 그날 하루의 문제점들과 그에 관련된 고객의 질문등을 정리해서 미국팀에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기대한 답이 안 오면, 제가 미국팀에 확인하고 싶어도, 미국은 저녁시간으로 모두가 퇴근한 시간, 그래서 재촉하기도 힘든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제가 이 13시간의 시간차를 해결하기 위해서 취한 행동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미국개발팀의 PM (project Manager)에게 전화해서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Zack, 내 메일 내용 이해했어? 여기 일본시간으로 다음날 8시까지 꼭 답을 해 줘", "J5 (저의 닉네님 Johnny Five 를 줄여서 J5로 부름), 알았어. 빨리 자. 꼭 답을 할 께." 미국팀은 처음에는 제가 몇일 전화하고 말겠지 했지만, 제가 2주일 이상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미국시간으로 오후 2시경) 전화를 하니까, 개발팀내에 소문이 퍼져서, 매일 제때 J5한테 답장을 안 하면 J5가 잠을 자지 않으니까, 모두들 꼭 답장을 하라고.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8시반까지 상황보고를 고객 KDDI 담당 PM (Project Manager)에게 할 수 있었고, 덕분에 고객 PM과 좋은 관계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문제점들이 어느정도 안정이 되어 제가 4박 5일로 한국에 휴가를 간 적이 있었는데, 다시 큰 문제가 발생했다는 연락이 와서 제가 서울에서 2틀도 못 쉬고, 급히 오사카로 돌아와서 대응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쁜 일정의 오사카 프로젝트가 약 6개월간 계속되었고, 다행히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고, 도쿄 본사의 영업부 관계자들이나 나가타상이 저에게 크게 감사하게 되었죠.

그러던 중 어느날 금요일 오후에 도쿄 본사에서 제가 나가타상하고 프로젝트 마무리에 대해서 얘기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나가타상에게 부탁을 하게 됩니다. "나가타상, 아시다시피, 이 프로젝트는 처음에 하세가와상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나가타상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기에 제가 나가타상을 위해서 한 것이었고, 저는 거의 1년간 이 큰 프로젝트를 맡아 하면서, 저의 개인생활은 전혀 없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정말 피곤하고요, 나가타상, 저 이대로는 더이상 모티베이션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J5, 너무 수고했어. 잘 알고 있어,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나가타상, 저의 모티베이션을 위해서라도, 저의 연봉 올려주세요". 나가타상이 그 자리에서 OK 하면서 바로 저를 데리고 인사부장에게 가서, J5 연봉 올려줄 겁니다. 라고 했고, 인사부장과 사장님의 승인하에, 저는 특별승진의 명목으로 대폭 연봉인상을 받게 되었죠.

처음부터 뭔가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 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데 너무 고생을 했기에, 저도 모르게 제 윗 사람에게 솔직히 제 감정을 얘기한 것이었고, 그것이 특별승진/연봉인상으로까지 이어진 경우였습니다. 

PS: 이 프로젝트 처음 몇달간 도쿄 렙에서 고객과 소프트웨서 기능시험을 하는데, 새로운 프로그램이 많다보니 기술적으로 대응이 힘들어서 제가 미국 개발팀에 SOS를 요청했고, 미국팀은 Calvin 이라고 약 15년간 개발팀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대만-미국계 고참 엔지니어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Calvin 이 일은 잘 하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고, 어느날 저에게 질문합니다. "J5, 너는 왜 그렇게 활기차고 엔티브 하니?" 그러면서 Calvin 이 자기의 개인적인 고민을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자기가 미국 개발팀에서 일을 잘 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중국 북경에 큰 프로젝트가 있으니 그걸 같이 하자고 해서 개발팀를 그만두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하려고 북경에 가보니, 속은 것을 알았고, 그 참에 아내와 이혼도 했고, 14살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것. 집에서 일도 없이 망연자실하고 있는 사이에 개발팀에 연락을 받고 이렇게 임시 계약직으로 일본에 온 것이라고. 이 친구가 일을 참 잘하는 친구였기에, 제가, "Calvin, 걱정말고 나 도와서 여기 일 열심히 해, 내가 복직 시켜줄께". 그리고, 저는 미국 개발팀 PM Zack에게 긴 편지 (이메일)을 보내서, Calvin 이 아주 일을 열심히 잘 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거기 개발팀이나 다른 팀에 자리가 나면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Zack이 도와서 복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걸 계기로 Calvin 은 그 프로젝트후에도 저와 친구가 되었고, 제가 달라스에 출장갔을 때, 주말에 저를 가기 집으로 초대해서 정말 후한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6) 영어실력 + IT 엔지니어 경력자는 한달에 130만엔 (약 1300만원)까지도
    - 하지만, 이 두 가지 요소를 갖춘 엔지니어를 찾는 건 하늘에 별따기인 게 현실

    a. Care 엔지니어의 경우
    b. Care TPM (Technical Project Manager) 의 경우
    c. Care PM (Project Manager) 의 경우

 a. Care 엔지니어의 경우

제가 일본에 와서 초기 KDDI 의 바쁜 프로젝트가 어느정도 안정되고, 미국 엔지니어들이 다 본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저희 부서는, 부서장 Lawrence (싱가폴 사람) 아래, 약 15명 정도의 일본인 엔지니어들이 있었고, 약 3개의 팀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만, 제가 담당하는 시스템은 당분간 저 혼자서 맡아서 했었죠. 당시에는 정말, 낮에도, 저녁 퇴근하고나서도, 주말에도 수시로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연락이 왔고, 저는 심지어 타고 있는 전철에서 내려서, 그 역내에서 PC를 켜고 리모트 접속해서 문제를 조사하고 해결하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심지어, 집에서 아침 저녁 샤워하면서도 휴대폰을 샤워실내 구석에 두고 대응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였죠. 서둘러 제 팀원으로 일할 엔지니어를 구해야 했는데, 우리 회사 개발팀은 미국 텍사스 달라스이므로 그들과 이메일/전화회의등의 소통을 하려면 당연히 영어가 되야 했고, 고객은 Docomo, KDDI, Softbank등 일본 고객이니 일본어가 되야 했고, 거기에 이왕이면 IT 엔지니어로서 어느 정도의 경력자를 조건으로 찾았습니다만, 보통 영어를 잘하면 IT 경력이 없고, IT 경력이 있으면 영어가 안 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보통 IT 엔지니어 경력은 없어도 영어/일본어를 잘 하는 후보자를 뽑았죠. 왜냐하면, IT 기술은 저희가 가르쳐 키우면 되지만, 영어를 따로 가르쳐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당시, 일본에서 고등학교부터 유학을 해서 영어도, 일본어도 잘하지만, IT 경력은 전혀 없는 필리핀 젊은이 Jayson을 뽑아서 업무내용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서 엔지니어로 키웠고, 약 6개월후에는 혼자서도 문제대응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서 많은 활약을 했죠. 당시에는 사원을 뽑으면, 미국 텍사스 달라스 본사 개발팀에 가서 1, 2주 교육을 받고 오곤 했기에, IT 경력보다도 영어실력은 정말 필수였죠.

20년전에 영어실력도 있으면서 IT 엔지니어 경력도 있는 엔지니어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인것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인재파견회사 여러곳에 부탁을 해도, 그런 엔지니어는 구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지금 현재 제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서도 이 문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실제 예를 들면,

Otsu-san은 대학에서 영어영문과를 졸업했지만,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직이 좀 더 쉬운 IT 엔지니어가 되기로 결심하고 IT 엔지니어 파견회사에 들어가서 3개월 기본 교육을 받고 현장에 파견되서 현장에서 선배들로부터 업무를 배우면서 실력을 키운 경우입니다. Otsu-san 은 영어는 아주 잘했죠. 대학에서 영어영문학과를 나왔으므로,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시스템을 많이 알게 되면서는 미국팀과도 이메일/전화회의등을 맡길 수 가 있었죠.
Otsu-san의 경우는 올 초까지 저희가 한달에 약 70만엔 (약 700만원 지불) 지급.

Yoshizawa-san 은 IT 분야의 베테랑으로 실력이 아주 뛰어났습니다만, 영어 (말하기, 쓰기)가 전혀 안되는, 영어로 된 시스템 메뉴얼등의 읽기는 되는 경우로, 현장에서 Yoshizawa-san이 Otsu-san을 가르치면서 키운 예. Yoshizawa-san은 저희가 한달에 약 80만엔 (약 800만원) 지급.

Kamagata-san (여성)은, 대학에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약한 음악가 였지만,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직이 용이한 IT 엔지니어가 되기로 결정하고 IT 엔지니어 인재파견 회사에 들어가서 3개월 기본 교육을 받고 현장에 파견되서 일하면서 배우고 실력을 키운 예. 대학교때 영어공부로 호주에 3개월 유학을 갔다 온 경험도 있어서 영어를 어느 정도 하지만, 유창하지는 않아서 어려운 시스템문제들을 영어로 설명할 정도는 안 되는 정도. 기본 대화는 가능한 정도. 역시, 대학때까지 음악을 전공하고서 IT 엔지니어가 된 경우로 기본/바탕 실력은 아주 약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하는 자세롤 보고 저도 많이 지도하고 도와주는 상황.
Kamagata-san도 저희가 한달에 80만엔 (약 800만원 지급).

Igarashi-san, 영어도 전혀 안되고, IT 엔지니어 경험도 채 1년도 안 되는 초보자. 하지만, 이런 엔지니어라도 구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서 저희 프로젝트에 파견받아서 제가 기초 지식을 가르치면서 일을 시키고 있는 상황. Igarashi-san은 한달에 60만엔 (약 600만원 지급).

제가 이 글 제목에서 말한 한달에 130만엔 (약 1300만원)까지도 지급은 실제 지금도 있는 상황으로 입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이 문제가 있어서 예정되로 진행되지 못하는 경우나, 새로운 시스템에 채용된 새로운 프로그램에 경험이 있는 엔지니어를 찾는 경우등에는, 영어실력 + 저희가 필요로 하는 스킬을 가진 경우, 한달에 130만엔 (약 1300만원)도 지급하고 있습니다,

 b. Care TPM (Technical Project Manager) 의 경우

제가 지금의 프로젝트에서 하는 역할이 Care TPM인데, 고객 네트워크에 전개된 저희 회사 시스템의 유지보수 팀의 기술팀장으로, 고객에게서 보고된 시스템의 문제의 원인규명, 해결책등을 팀원들과 같이 조사하고 해결 하는 역할입니다. 보통 비교적 큰 문제들의 원인규명와 해결책등을 고객에게 보고하고 설명하는 등의 고객과의 채널은 팀장이 하죠. 물론, 팀원 엔지니어들이 어려워 하는 문제는 팀장으로서 어드바이스 하면서, 해결하도록 도와야 하기에, 그 만큼 팀장은 팀원들보다도 그 시스템에 대해서 훨씬 많이 공부해서 알고 있어야 하죠. 그래야, 팀장다운 팀장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늘 새로운 기술, 진보된 기술 서적을 누구보다도 먼저 읽고 공부해서 알고 있고자 노력하고 있죠.

팀장은 고객과의 채널(이메일/전화소통등), 그리고 미국 개발과의 채널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나 일본어와 영어 모두가 필수입니다. 그리고, IT 분야의 풍부한 경력이 요구되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격을 갖춘 Care TPM을 찾기는 엔지니어보다도 훨씬 힘들고, 그만큼 높은 ㄱ급여를 받습니다.

저의 경우는, 영어와 일본어가 되고, IT 경력도 있어서, 회사내에서 특별히 '필수인력'으로 등록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c. Care PM (Project Manager) 의 경우

Care PM은 연간 유지보수 프로젝트의 스케줄관리, 수익 (Profit/Loss)관리, 매주 고객과의 정기 weekly call (meeting)에서 현재 조사중인 모든 문제들의 현황보고, 엔지니어등의 인원관리, Software upgrade 에 관련된 고객과의 조율등, 프로젝트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므로, 고객과의 소통, 그리고 우리 회사내 management (관리자)들과의 소통등을 하기 위해서, 더 높은 수준의 영어실력 + 일본어 실력이 요구됩니다. (여기 일본의 프로젝트에서는 요).
그래서, 이런 요건을 갖춘 PM을 찾기도 아주 어렵습니다. 즉, 이런 PM에게는 한달에 130만엔 이상을 주면서 모셔오게 됩니다.

이상의 예에서 보시듯이, 우리가 정말 영어실력(쓰기, 말하기,읽기) 하나만이라도 갖추면, 설사 이 분야에 경험이 없다해도, 예를들어, 엔지니어로서, TPM으로서, PM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특히나, 비교적 높은 급여/연봉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게 현실입니다.

7) 영어말하기 수준 평가 인터뷰에서 1등한 이야기

약 6년전에 저희 부서의 부서장 다나카상이, Care PM/TPM 팀원 약 20여명이, 대부분 일본인 Care PM/TPM으로, 이들의 영어 (말하기, 쓰기)주준이 좀 아주 낮은 편이어서, 다나카상이 팀원들에게 특별히 '영어로 프리젠테이션 하는 스킬' 이라는 교육을 시켜주겠다는 첫번째 이메일 연락이 왔고, 얼마후에 2번째 이메일에서, 이 교육을 카나다의 어느 영어교육기관에 의뢰했고, 이 교육기관에서는 이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대상자들의 영어 말하기 수준을 파악해서 반을 평성해야 하므로 각자 30분씩 영어면접을 실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화요일 아침 10시부터 10시30분이라는 이메일 연락을 받았고, 이메일을 자세히 보니, 인터뷰하러 오는 카나다 사람의 이름은 Geremi라는 것외에는, 30분동안 어떤 주제로 영어인터뷰를 하는지를 찾아보았지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보니까, 이 인터뷰는, 한사람 한사람이 인터뷰 방에 들어가서, 앉아서, Geremi 가 물어보는 것에 영어로 답을 하는 수동적인 형태의 인터뷰이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고, 저는, 그럼, 이 30분간의 인터뷰를 좀 더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내가 적극적으로 리드하고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인터뷰 시간으로 해야겠다고 미리 마음을 먹고 임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저> "Hey, Geremi, How are you? I'm Johnny Five",
Geremi> "What?, You are Johnny Five?"
저> "Yes, I am still alive" (그래, 나 아직 살아있어)
Geremi> " Oh My God!, Johnny Five!",

하면서 Geremi 가 크게 웃었죠.

제가 인터뷰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나, Johnny Five야" 라고 저를 소개한 이유는, 대부분의 미국사람이나 카나다사람들은 당시 약 20여전의 미국영화 'Short Circuit'라는 유명한 영화의 주인공 (사람이 아닌 로보트) Johnny Five 에 대해서 알고 있고, Johnny Five는 그 영화와 함께 사라진 인물 (로보트)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농담으로 '나 아직 살아있어'라고 하면, 바로 농담임을 깨닫고 웃는다는 걸 제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Geremi 와의 첫대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제가 큰 소리로 활기차게 농담의 인삿말로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제가 말했죠.

"Geremi, what can I help you?"
 
내가 뭘 도와줄까? 라고 질문하자, Geremi 가 너의 꿈에 대해서 말해봐, 라고 했고, 저는, 나의 개인적인 꿈에 대해서?, 아니면, 회사 업무상의 꿈? 이라고 물어봤고, Geremi 가 어느 것이나 괜찮다고 했고, 저는 저의 '아침영어'에 관한 꿈을 얘기했죠. 그러자, Geremi 가 여기 앉으라면서, 자기가 오늘 인터뷰를 하는 목적은, 수업을 들을 대상자들의 영어 말하기 수준을 파악해서 반을 편성하기 위함이고, 이 30분간의 인터뷰는 동영상으로 녹음이 되서, 카나다 본사로 가져가서, 여러사람들이 함께 보고 평가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30분간의 인터뷰를 제가 구상한대로, 수동적이 아닌, 제가 리드하는 능동적이고, 활기차게 해서 마쳤고, 그후, 약 1달후 어느날 저녁에 다나카상이 저를 부르더니, 그 30분간의 영어말하기 인터뷰 체점 결과가 나왔는데, 제가 1등이고, 2등과의 차가 아주 크다며, 역시 김상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채점 결과표를 보니 약 20여개의 채점 항목이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영어 단문 표현 실력', '영어복문 표현 실력', '말할 때의 상대의 눈을 보면서 말하는 지', '발음' 등과, 또 하나 '에네르기 (활기참)' 이 있었는데, 저는 어떤 항목은 7점, 8점도 있었지만, 이 '에네르기 (활기참)'은 10점 만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다나카상팀에서 일하게 된 지 약 6개월 되는 때여서, 다나카상도 저에 대해서 모르는 면이 많았는데, 이걸 게기로 다나카상이 저를 높이 평가하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PS: 저는 회사에서 어떤 미팅/회의등에 임할 때, 꼭 그 미팅/회의가 이미있는 미팅/회의가 되도록 꼭 미리 준비해서 임하는 스타일입니다. 제가 주제하는 미팅/회의라면, 꼭 이 미팅/회의의 배경/목적이 무엇이고,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뭘 전달하고, 뭘 부탁하기 위한, 어떤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미팅인가등을 간결하고 명확히 PPT로 만들어서 임합니다. 아무런 자료도 준비없이, 그냥 회의에 들어가서 말로 이런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고, 또 이 회의를 통해서 뭘 달성하고자 하는지가 참가자들에게 분명히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제 경험상으로 알고 있기에 꼭 사전에 준비해서 임하려고 하고 있죠. 설사, 제가 주제하는 입장이 아니고, 참가자의 자격으로 그 미팅에 참가한다해도, 이 미팅의 주제/목적은 뭐고 이 미팅에서의 나의 역할은 뭔지를 꼭 미리 생각하고 참가하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Geremi 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주제로 인터뷰한다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그럼 내가 리드해서 이 30분을 의미있는 30분으로 만들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하고 인터뷰에 임한 것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었습니다.


8) 일본에서 중국어 공부한 이야기

이야기 (1)  매주 토요일 오후 2시간 개인래슨으로 중국어 발음을 철저공부

매일 아침 맥도날드에서 2년간 새벽 5시 반부터 3시간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한 다음에, 제가 주말 시간등을 이용해서 공부한 것이 중국어였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이유는, 제가 Atlas Telecom 에서 international field engineer 로서 중국/한국/일본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을 때, 중국의 우한, 시안, 항조우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 듣는 중국어 발음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정말 '중국어 (발음)에 한눈에 반했다' 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꼭 공부하고 싶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본에 와서 일하게 됨으로서, 먼저 일본어를 공부한 것이고, 이어서 중국어를 공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제가 살던 나가야마에 있는 공민관 내 도서관 시설안을 걸어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소리가 들렸고, 저는 저도 모르게 제 몸이 그쪽으로 가서, 2명의 일본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중국인 여성분에게, 대뜸  "저도 가르쳐 주세요" 라고 했고, 그걸 계기로, 그 중년의 중국인 여성분으로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에 2시간 4000엔 (우리 돈으로 약 4만원)에 개인교습을 받기로 해서 시작했습니다.
일본어와는 달리 중국어는 4성의 발음을 정확히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어는 독학으로는 힘들다고 판단해서, 개인교습으로 발음을 정확히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 중년의 중국인 여성분은 중국 사천성 출신으로 중국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소수 인원을 가르쳐본 경험도 있어서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우선 무엇보다도 발음공부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선생님의 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해서, IC recorder 와 작은 거울을 준비해서 수업에 임했습니다. 작은 거울은 그 선생님이 어느 단어의 발음을 하실 때의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고, 제가 거울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하려고 했던 것이고, IC recorder 는 2시간의 수업이 끝날 무렵, 그 선생님에게 오늘 2시간 수업의 중요 단어의 발음을 IC recorder 에 녹음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매주 수업을 마무리 하면서, 큰 소리로 그날 수업에서 공부한 중요 단어들의 발음을 IC recorder 에 녹음해 주셨고, 저는 그걸 가지고 와서 제가 살고 있는 집 뒤의 공원에 가서 IC recorder 의 발음을 들으면서 반복해서 따라하는 식으로 발음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중국어 발음에 꽤나 까다로운 분이셨지만, 저의 중국어 발음이 크고 정확하다면서 칭찬해 주시는 경우가 많았고, 저는 그렇게 1년정도 그 분한테서 중국어 발음을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
그후에 중국어 발음에 어느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저는, 제가 사는 곳에서 가까이에 있는 시민센터에서 매주 수요일 무료 중국어 회화반 (취미교실)이 있음을 알고 퇴근길에 그곳에서 중국어 기초 회화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취미교실에는 일본인 중년이나 노인분들 약 15명정도가 공부하고 있었고, 당연히 제가 유일한 외국인 (한국인)으로 그 교실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제가 한국인인데다, 수업시간에 제일 열심히 하는 저를 귀여워 해 주셨고, 제가 퇴근해서 온다는 것을 알고, 간단한 도시락을 싸 와서 먹으라고 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 중국인 회화반에서 중국어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은 도쿄에 있는 '오비린 대학' 에서 중국어를 가르치시는 중국인 여성 교수님으로, 자원봉사 차원에서 매주 수요일 그 곳에서 중국어를 가르처 주시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수업 교재 (중국어 회화책) 제 15의 본문을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읽으라고 하셨고, 저쪽부터 한분 한분 책을 보면서 읽으셨고, 제 차례가 왔을 때, 저는 "선생님, 저는 일어나서 책을 안 보고 본문을 말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일어나서 또박또박 크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습니다. 제가 다 읽고 나자, 선생님께서 한 1분간 아무말도 못하시고 서 게시더니, "여러분, 박수" 라고 히시면서 박수를 쳐 주시면서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박수치라고 했는지 아세요? 김상이 안보고 다 외워서가 아니라, 정말 발음이 너무도 깨끗하고 정확해서 놀라워서 입니다. 제가 오비린 대학에서 많은 일본인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이렇게 중국어 발음을 정확히 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중국 본토에서 조차도 이렇게 정확히 발음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때 제 중국어발음이 나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중국어를 처음부터 발음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길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기 (2)  일본 오비린 대학의 중국어 교수님께서 저의 중국어 발음을 극찬

그렇게 일본사람들 사이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던 어느날, 아라이상 (중년의 남성분) 하고, 사또상 (중년의 여성분)이 저한테 와서, "김상, 우리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은데, 별도의 취미교실을 개설해서, 한국어를 가르쳐 주세요" 라고 부탁을 했고, 저는 그러자고 했죠. 당시, 이런 취미교실은 취미반을 관리 운영할 대표자와 수강생 5명이 있으면, 제가 살고 있던 곳에 있는 나가야마 공민관에 정식으로 취미교실로 등록되서 매주 수업할 수 있는 교실을 무료로 배정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라이상이 대표로 취미교실을 관리/운영하기로 하고, 주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분들을 모아서, 약 7명의 학생으로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두시간 한국어 교실을 시작하게 되었고, 저는 신주쿠의 큰 서점에 가서, 일본어로 된 '한국어 기본 회화'책을 교재로 정하고, 참가 학생들은 그 교재를 준비해서 수업에 참가하도록 해서, 한글의 기본발음 (모음, 자음, 격음등)부터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참가자는 대부분, 중년이상의 일본인 남성/여성분들로, 대부분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한국드라마 대사를 한국어로 알아듣고 싶어서, 좋아하는 한국 가수의 노래를 알아듣기 위해서 등이었죠. 저는 참가자분들이 어느정도 나이가 드신 분들임을 감안해서, 너무 타이트하게 수업을 하기보다는, 활기차고 재미있게 가르치고자 노력했습니다.
일본인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느끼고 배운 점은, 1) 일본어와 한국어의 문법이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 2) 어순이 거의 똑같다는 것, 3) 일본어는 특히 한자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한자를 공부한 우리에게는 일본어가 정말 쉽게 다가온다는 것등이었습니다.

이런 점을 참고해서, 한글 문법을 가르칠 때는 일본어 문법과 같다는 점을 비교 강조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했고, 어순도 정말 똑 같음을 강조해서 설명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한국 드라마나, K-Pop이 일본에서 정말 인기가 많았던 때라서, 우리 한국어 취미교실에는 매주 1, 2명이 새로 들어왔고, 많게는 15명을 넘을 정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이치하시상이라는 중년의 여성분이 새로 들어오셨는데, 다른 곳에서 한국어 교실에 참가해서 공부를 해 오고 있었는데, 수업내용이 너무 이해가 안되고 어려워서, 소문을 듣고 제 교실에 오셨다면서 몇주 참가하시더니, 제 수업을 재미있고, 문법설명등이 정말 알기 쉽다면서, 오길 잘했다고 하셨고, 이 분은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셨습니다. 새벽에 산보하면서 한글의 숫자 1, 2, 3...., 하나 둘 셋 을 외우기 시작했고, 제가 매주 내주는 한글 작문 숙제를 누구보다도 잘 해 오셨습니다. 그러다보니, 3,4 개월후에는 기존의 학생들 누구보다도 한국어를 잘 하는 학생이 되었고, 이 분은 저의 교수법을 좋아한 나머지, 저에게 '한국어 기초회화' 같은 책을 내시라고 하면서, 저의 2시간 수업 내용을 다 노트정리해서, 집에 돌아가서 자신의 PC로 다시 워드로 다 정리해서 그 다음주 토요일에 제게 주기 시작했습니다. 수업중에 설명을 위해서 제가 칠판에 그린 그림이나 화살표등도 워드의 그림그리기 기능을 이용해서 그래로 그려 표시하거나, 색깔도 넣어서 표시하는 식으로 정말 4,5페이지로 잘 정리해서 매주 저에게 주셨습니다.

좀 뒤에 안 사실인데, 당시 이 분은 딸이 먼 히로시마로 시집을 갔고, 아들은 결혼해서 여자분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우기 일쑤여서, 자식들 다 키워서 시집 장가 보내고, 혼자서 많이 외롭고 우울한 상태였는데, 제 토요일 교실에 와서 활기차고 재미있는 수업을 통해서 활기를 찾고 한국어를 아주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생활이 아주 활기차게 되신 경우이셨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그렇게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셨고, 매주 수업을 다 워드로 정리해서 저에게줄 정도이셨던 것이었죠.

당시 매년 가을에는, 한국어 요리를 직접 만들어서 먹는 날을 갖곤 했는데, 3명씩 1조를 짜서, A조는 잡채만들기, B조는 김치찌게 만들기, C조는 지지미 만들기, D조는 김밥 만들기, 로 정해서, 필요한 재료 (양념등)는 아라이상이 2,3주 전부터 신오쿠보의 한국인 거리에 있는 한국슈퍼에 가서 미리미리 사서 준비하셨고, 야채는 당일 아침에 근처 슈퍼에서 샀고, 밥을 위한 쌀도 미리 누가 가져올까 정하는 식으로 해서 준비했고, 당일날은 미리 예약한 공민관의 조리실에서, 각조가 한국어 레시피의 뜻을 이해/공부해 가면서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한국어 레시피의 뜻을 설명해 주면서 진행을 했죠. 다 만들고 나면, 넒은 테이블에 만든 요리를 놓고 먹었는데, 서툴게 만든 요리였지만, 그 맛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이 한국어 교실은 약 6년간 지속되었는데, 이치하시상은 한국어가 아주 유창해 지셔서, 한국어 능력시험 2급에도 도전하셨고, 나중에 '외국인 교류센터'에서 남편의 직업(일)로 남편따라 일본에 와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한국인 주부들에게 (한국어로) 일본어를 가르치는 역할도 하셨습니다.

이 교실은 나중에 제가 회사 프로젝트로 아주 바빠지게 되면서 더 이상 못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취미교실의 간사로서 관리와 운영을 맡아 해 주신 아라이상 (당시 50대 후반의 아저씨) 은, 매해 여름에 제가 후지산 야간등산을 좋아한다는 걸 아시고, 본인의 차로 저와 같이 가기 위해서, 1박 2일의 후지산 야간등산 플랜을 짜서 저를 데리고 가 곤 하셨습니다.
글 플랜에는, 금요일 점심, 저녁, 그리고 후지산 정상에서 마실 커피등이 다 준비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들어, 금요일 밤 후지산 야간등산을 보러 갈 경우, 그 분 차로 금요일 오전 10시에 출발, 중간에 점심은 강가에서 한국식 비빔국수를 만들어 주셨고, 후지산 5부능선 주차장에 오후 4시경에 도착해서 주차장을 확보하면, 저녁 5시에 준비해 간 오니기리와 미소스프를 먹고, 저녁 7시까지 차에서 쉬고, 7시부터 야간산행을 시작. 아라이상 등산 가방안에는 후지산 정상에서 다음날 새벽 해돋이를 보고 난 후, 따뜻한 커피를 만들어 마시기 위한 뜨거운 물과 드립커피가 준비되어 있었죠. 다음날 하산해서 도쿄로 돌아오는 길에는 온천에 들러서 온천하고, 그 안에서 점심을 먹고, 도쿄로 돌아오는 식으로, 1박 2일의 계획표를 짜서, 후지산 야간산행을 매년 여름에 같이 가 주셨습니다.


이야기 (3)  신주쿠에 있던 Hao 라는 중국어 학원 망년회에서 제가 선생님께
                중국어로 쓴 감사의 편지를 90여명 앞에서 큰 소리로 읽음

저의 일본에서의 중국어 공부는, 제가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가 아주 바쁜 경우에는 일단 중단하고, 프로젝트가 끝나고 좀 여유가 있으면 다시 하곤 했는데, 한번은 신주쿠에 있는 중국어 학원 'Hao'라는 곳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 5시에 1시간씩 기본회화를 man-to-man 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주로 일본에 사는 중국인 여성분 (주부들)들이셨고, 아주 친절하고, 질문하면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아주 마음에 드는 수업이었습니다.

약 6개월 다닌 시점에서 12월 년말이 다가왔고, 저는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서 12월 24일 토요일 수업에서 읽어드려야 겠다고 마음먹고, 준비를 했습니다. 물론, 학원에서는 그런 편지를 쓰라는 말은 없었고, 완전히 저 개인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내용은, 6개월간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며, 어떠한 질문에도 매번 자세히 답변해 주셔서 감사하고, 수업은 매번 재미있고, 충실해서 정말 유익한 수업을 통해서 많이 배웠다는 것이었고, 약간의 농담도 섞어서 준비했습니다. 먼저, 제가 짧은 중국어 실력이었지만, 그때까지 배운 단어와 문법을 총 동원해서 중국어로 썼고, 회사내의 중국인동료에게 수정해 받아가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12월 24일 토오일 수업시간에 제가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 왔으니 읽어드리겠다고 하고 읽었습니다. 그러자, 중국인 여자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런 감사의 편지를 써 온 사람은 없었다며, 감사해 하셨고, 더나아가, 내용도 좋고, 발음도 아주 좋으니, 그날저녁 그 학원생도 전체와 하는 학원 망년회에서 발표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단지, 선생님을 위해서 써 온 편지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앞에서 발표할 정도는 안된다고 거절했지만, 선생님은 내용도 좋고 저의 발음도 좋으니 발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 학원에서는 시내의 어느 큰 중국식당을 통째로 빌려서 매년 하는 망년회를 개최하였고, 저도 참가해서, 중국음식도 먹고, 옆사람과 선물교환 행상등에도 참가했습니다. 망년회가 어느정도 끝날무렵, 그 선생님께서, "여러분, 지금부터 김상이 저에게 특별히 써 온 감사편지를 읽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라고 했고, 저는 약 90여명(학생들 70여명, 학원 중국인 선생님들 약 20여명) 앞에 나가서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고, 읽기를 마치자 모두 기립박수를 쳐주었고, 특히 중국인 선생님들은, "아니, 우리학원에 이런 생도가 있었다니, 발음이 너무 좋아요" 하면서, 저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날 그런 망년회를 마치고, 다음날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데, 그 중국어 학원에서 전화가 와서, 어제 저녁에 제가 발표한 그 감사편지를 학원 블로그에 올려도 되겠냐는 것이었고, 저는 좋다고 했죠.

이야기 (4)  일본인 아사미상에게 중국어 발음을 개인래슨, 그리고 친한 친구가 됨

그후 바쁜 프로젝트 관계로, 중국어 공부를 한동안 중단하고 있다가 다시 시작할 때는, 신주쿠 시내에 있는 Nova 라는 일본 전국에 있을 정도로 아주 큰 어학원에서 중국어를 공부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 퇴근후 가는 수업이었는데, 어느날은 토요일 오후에 있는 중국어 free talking 수업에 참가했습니다.
중국인 선생님이 교실 앞쪽 의자에 앉아 있고, 교실 벽쪽에 약 20여명의 학생들이 서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중국어로 말하는 식이었는데, 그 중에 3, 4명은 중국 북경 어학원에서 1년정도 공부하고 온 사람들도 있었고, 대부분 어느정도 중국어를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실력은 뒤떨어지지만, 평소 외워두었던 중국어로 제 소개를 포함해서 왜 중국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등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40분 free talking 시간이 끝나고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누가 제 등을 치면서, 잠깐 얘기할 수 있냐면서, 조금전 free talking 시간에 여러사람이 중국어를 말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제 중국어발음이 강약/높낮이가 뚜렸하고, 깨끗하게 들렸다면서 그 발음이 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중국어에는 영어나 일본어와 달리 4성의 발음이 있어서 그걸 충실히 명확히 발음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거라고 했더니, 잠깐 커피 한잔 하자면서 저에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으셨습니다. 고민인즉, 자기는 도쿄에서 좀 떨어진 찌바현 가시와에 있는 Nova에서 2년간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2년이나 공부했음에도 자기의 중국어를 선생님외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최근에 알아서, 도대체 뭐가 문제이길래 자기의 중국어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지 답답해서 오늘 특별히 신주쿠 시내의 Nova 본점 수업에 참가해 본 거라면서, 이제보니, 그 중국어의 발음 4성에 대해서 그 가시와의 Nova 에서는 처음부터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았고, 2년동안 문법과 작문 중심으로 수업을 해서, 자신은 발음은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공부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자기의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오늘 김상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분은 일본의 Kirin 맥주회사에서 33년이상 영업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회사원이라면서, 중국어는 자신의 유일한 취미로, 중국어 공부를 그만두고 싶지 않으니, 저보고 발음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시간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했지만, 그 분 (아저씨)는 제발 부탁한다고 했고, 저는 그럼, 매주 일요일 아침 10시부터 1시간 공부하는 걸로 하자고 했고, 그 분은 개인렛슨 댓가로 매달 1만엔 정도를 지불하기로 하고 렛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습득하고 터득한 중국어 발음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가르쳐드렸습니다. 물론, 중국어 발음의 모음, 자음, 합성모음등의 발음법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 분은 어디까지나 순전히 취미로 중국어를 공부하시는 것이었기에, 천천히 꾸준히 하면 되는 것이었고, 이 분은 일본인 특유의 작고 조용한 발음이 아닌, 거칠고 높고 강한 중국어 발음을 저를 따라하느라 힘들어 하셨지만, 재미있어라 하셨고, 저와의 수업 내용을 매주 집에 가서 깨끗이 노트에 다시 정리해 오는 그런 아주 착한 학생이셨습니다.
그렇게 매주 수업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고, 이 분은 아오야마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셨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세계사는 물론, 중국, 일본, 한국의 역사등 정말, 역사에 대해서는 아주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저에게 세계사를 포함한 역사에 대해서 조금씩 설명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예를들어, 세계 1차 대전은 어떤 계기로 발발했는지, 영국과 독일이 왜 싸웠고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그로인해서, 강대국의 식민지 구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후, 어떤 길을 걸어왔고, 히틀러가 등장해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등등..., 예를들어, 제가 일본은 당시 이미 강대국인 미국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왜 진주만을 공격했나요?
라고 질문하면, 2, 3 주에 걸쳐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련 자료등을 가져와서 설명해주는 식으로, 정말 역사에 대해서는 깊이 알고 계신분이십니다.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언제 무슨일이 있었는지, 그 날짜를 다 기억하고 말할 정도로 해박하신 분이셨습니다.
역사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경제,문화,역사등 모든 분야에서 필요할 때마다 저에게 설명해 주시고, 그렇게 설명해 준 것을 실제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관련 장소나 이벤트 행사등에 데리고 갑니다. 예를들어, 일본의 전통적인 축제에 대해서도, 일본 전국적으로 크고 유명한 축제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실제 그 축제가 행해지는 날에 그곳에 가서 관람하는 식, 또 매해 봄에 도쿄에서 벗꽃으로 유명한 곳에 데리고 가서 같이 보면서도, 그 주변의 영국대사관이나, 역사적인 건축물등을 겸사겸사 설명해 주시곤 하셨죠.

중국어 발음에 대해서 3년정도 공부하신 후,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하셔서, 3년정도 한국어의 발음과 문법등을 공부하셨고, 한국어를 어느정도 읽고 쓸 수 있게 되시자, 그때부터 이 분이 한 것은, 역사나 일본의 정치/경제/문화등에 대해서 저에게 설명해 주실 내용을 A4 용지 반 정도의 종이 앞뒤에 빼곡히 한글로 정리해서 써오시는 것이었습니다.
(PC 의 워드로 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작은 글씨체로 쓰셨음)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중에 저에게 설명해 주실 내용을 먼저, 일본어로 정리하시고, 그 내용을 다시 최대한 간추린 다음에, 토요일에 약 4시간 걸려서, 한국어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가면서, 손으로 A4용지 반 크기의 종이 앞뒤로 빼곡히 한국어로 쓰셔서, 일요일에 저에게 주셨고, 저는 그걸 읽고 그 내용을 통해서 역사나/일본의 문화&정치등에 대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됨과 동시에, 아사미상이 한국어로 쓴 내용에서, 한글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이나, 단어등을 고쳐주거나, 의미전달이 좀 안 되는 문장을 새로운 문장으로 고쳐주거나 하면서, 한국어 공부 자료도로 활용하였습니다.

또 아사미상은 한자도 아주 멋있고 정확히 쓰시는 분으로, 한자를 쓸 때, '한획 한획 선의 퀄리티'와, 한글자 한글자의 좌우, 상하 발란스를 맞춰서 써야 한다면서, 저에게 한자쓰기도 지도해 주시고 게십니다.

아사미상과의 이런 관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서,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2시간 아주 유익한 정보와 공부의 교류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